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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롭지엥 Oct 31. 2020

런던2층버스와, 그리고 인종차별

이런 주인공은 사양합니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남편이 출장만 가면 저에게는 '일'이 터집니다.

이번에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국의 빨간 이층 버스 안에서였습니다.


나에게도 그 일이 일어납니다.


인종 차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해외생활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겪게 된다는

인종 차별, 이번에는 제가 그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이층 버스는 저와 제 아이들의 놀이터였습니다.

빨간 사과같이 생긴 버스를 타고 내부 계단을 통해 2층에 올라갑니다.

2층 자리에서 즐기는 아찔한 뷰는 우리가 '런더너'로 이곳 영국 런던에 있음을 자각시켜주는,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사치. 우리들의 행복한 즐거움이었습니다.


빨간 이층 버스의 2층 맨 앞자리는 그야말로 로얄석입니다.

전면이 확 틔여 런던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고, 2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꼭 놀이동산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착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커다란 가로수 나무의 잎사귀나 나뭇가지를 건드리며 지나갈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아슬아슬 좁은 도로를 용케도 빠져나가는 버스 운전기사가 운행하는 이층 버스를 타고 갈 때면

아이들은 꼭 ,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의 버스 같다면서 깔깔깔깔 행복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제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영국의 이층 버스에서 인종차별을 겪게 되는 건가요?


그 주인공이 왜 하필 저란 말입니까?




어느 지난 토요일, 남편은 아침 새벽부터 독일로의 출장을 가기 위해 공항 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모처럼 저만의 약속이 있는 날,

하지만 이번 주말도 독박 육아 당첨!이네요.


오늘의 모임에도 '자유부인'은 글렀습니다.

두 명의 임신부가 출산을 앞두고 있어, '베이비 샤워' 겸 맛있는 점심을 먹기로 한 자리였습니다.


모임의 구성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약속 장소로 향했습니다.

버스를 타기에도, 운전을 해서 가기에도 무리 없는 거리였지만 빨간 이층 버스를 사랑하는 아이들은 이층 버스를 타자고 성화입니다.


둘째의 낮잠 시간과 겹쳐 이동이 쉽지 않을 것 같아 유모차를 가지고 가는 조건으로 아이들과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유모차를 가지고 간다는 뜻은 2층 자리에는 올라가지 않는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버스를 타지만 유모차 때문에 1층에 탑승하겠다는 약속을 단단히 받아놓고 나서야 버스에 올라탑니다.


그렇게 약속 장소에 도착한 우리는 모처럼 가진 '외식'과 '한국말 수다'사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늦은 점심부터 이어진 식사자리는 어느덧 어둑어둑한 어둠이 내리고서야 가까스로 끝나게 되었지요.


10월부터 영국의 낮 길이는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고,

이 무렵에는 4시 반부터 해가지기 시작해서 5시가 넘으니 깜깜한 어둠이 순식간에 찾아왔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둘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큰애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영국의 버스는 저상버스로, 차체 바닥이 낮고 출입구에 계단 대신 경사판이 있어 휠체어나 유모차가 진입이 가능합니다. 1층에는 유모차와 휠체어의 '오픈 공간'이 있습니다.


저는 유모차에서 잠을 자고 있던 둘째를 그대로 유모차에 태운 상태로 버스에 올라타 그 '오픈 공간'에 유모차를 세우고 서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만원 버스였습니다. 첫째도 앉을 좌석이 없어 저와 큰아이는 거의 포개어져 유모차 옆에 꼭 붙어 있었습니다.

'오픈 공간'은 휠체어나 유모차를 2대 정도 위치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기 때문에

최대한 유모차를 벽 쪽으로 붙이고, 큰 아이와 제가 포개어져 누군가를 위한 최대한의 공간을 비워 놓았습니다.


그때 뒷문으로 휠체어 하나가 올라옵니다.


버스에 타면서부터 요란한 욕과 함께 등장한 중년 여자과 중년 남자.

육중한 몸을 휠체어에 의지한 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욕을 하면서 들어오는 중년 여자와, 그 휠체어를 끌고 들어오는 왜소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습니다.

그들의 등장과 동시에 좁은 버스 안에서는 알코올 술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휠체어 손잡이 너머로 보이는 그 남자의 손등과 팔목에는 문신들이 요란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시선을 피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중년의 여자가 저를 노려보면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What the fXXX You, why you stay here?   (욕하면서, 너 왜 여기 있니?)

Because of you, the other English mum with the buggie could not get in this bus.

(너 때문에 유모차를 가진 다른 영국 엄마가 이 버스를 못 탔어)

You should learn about our English culture! (너는 우리 영국의 문화를 배워야 돼!)


저를 압도하는 눈빛과 목소리

순간 기가 막히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내 옆에서 내 아이들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나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앞인데, 영락없이 눈물부터 쏟아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라니.


정신을 차리고 논리적으로 말을 해봅니다.

"나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휠체어나 다른 유모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충분히 비워두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내가 이 공간을 차지했으니, 그 이후에 유모차를 가진 사람은 이 버스에 타지 않는 게 상식입니다."


그러자 얼굴이 붉으락 거리면서, 그 여자는 욕을 중얼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휠체어를 잡고 있는 남자에게도 소리를 지르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버스 승객 중 한 사람이 한마디를 거들기 시작합니다.


"술을 마셨으면 조용히 좀 하세요.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승객들이 저와 제 아이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반응이 궁금한 것인지, 이런 논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방관하는 것인지 야속하기도 하면서

그 사나운 여자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을 해준 승객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저는 무섭고 손이 바르르 떨렸고 본능적으로 유모차를 벽 쪽으로 돌려 둘째 아이의 시선을 차단하고,

첫째 아이를 제품에 안고 방어자세를 취했습니다.

저를 때리기라도 할 시늉으로 막무가내로 욕을 해대는 여자였습니다.


무사히? 몇 정거장을 지나친 후 그 욕하는 휠체어의 여자과 남자는 버스에서 내렸고

버스에 내리면서 나를 위해 한마디 거들어 주었던 그 승객을 응시하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힘껏 치켜세우고 사라졌습니다.


멍한 얼굴로 넋이 나간 채 서있는 저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 없이 흑흑 울고 있는 저의 첫째한테 한 금발머리의 꼬마가 다가와 작은 초콜릿 쿠키 봉지 하나를 건네줍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의 엄마가 와서는 이렇게 말하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너는 오늘 이상한 사람을 만난 거야, 너무 아파하지 마.

 우리 아이가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이 초콜릿 쿠키를 주고 싶대.

 너의 아이가 초콜릿 쿠키로 조금이나마 마음을 달랬으면 좋겠어."



쿵닥쿵닥 빠르게 뛰는 맥박 만큼 발걸음을 재촉하여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에 나왔는데 참았던 울음이 터집니다.


노려보면서 욕을 하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고

아이 앞에서 엄마로서 그 상황을 잘 대처한 것인가에 대한 무력감과 회의감이 밀려왔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처럼 나도 그여자처럼 욕이라도 퍼부어줄 것을(쫄보라 불가능 하지만) 후회했고


또 그동안 쌓였던 해외생활의 어려움과 외로움이 동시에 터져서 한없이 서러웠습니다.

그리고 초콜릿 쿠키를 건네 주었던 그 꼬마의 작은 손이 떠올랐습니다.






해외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아니 여러 번 인종차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종차별을 겪었을 때,

누군가는 그 상황을 녹화하거나 녹음해서 증거부터 마련해 두고,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고

누군가는 똑같이 응대해서 아시아인이 만만치 않은 상대로 인식시켜 줘야 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보통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어딘가 '아픈' 사람들이니 무시하고 그 자리를 피하라고 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다양한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막상 저에게 그 일이 닥치니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이게 무슨 인종차별이냐 그냥 재수 없었던 날이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인종차별 문제는 늘 이슈입니다.

해외 살이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외국인이 의외로 드물다는 것입니다.

동양, 아시아는 다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영국에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글로벌화된 이 시대에 발 맞추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깨어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길 바랍니다.


더 이상은 이런 아픈 에피소드가 없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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