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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강훈 Aug 16. 2024

김미옥 <미오기傳>

<소멸의 아름다움>

“선생님, 볼펜으로 사인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마음속으로 한 말이다. 북토크에서 작가의 사인을 받는 시간이었다. 길게 늘어선 줄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내 차례가 왔다. 책을 내미는 순간 작가님은 연필로 친필 사인을 하고 계신다.

사실 내 호주머니에는 만년필이 있었다. 드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참았다.

‘볼펜이 없으신가? 연필을 좋아하시나? 연필의 흔적이 세월을 못 이겨 지워지면 어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두 권의 책에 사인을 받고 돌아선다.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는 북토크 참석 전 다 읽었지만, 「미오기전」은 한동안 읽지 않았다. 서평과 독후감이 한동안 내 피드를 꽉 채웠기 때문이다. 수많은 독자님의 서평과 독후감만으로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의 약간의 스포일러 때문일까? 그래서 사실 책장을 넘기기 싫었다. 북토크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으니 그러려니 하고 가방 속에 넣었다. (책꽂이가 아닌 가방에 두면 언젠가 읽게 될 테니까….) 정말 가방 속에 한 달을 들고만 다녔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오늘, 이 책을 다 읽고 말았다. 사실 내용이 많이 궁금했다.

더 일찍 읽을 걸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가방 무겁게 시리) 


「미오기傳」의 순서가 기억의 통각점들을 고른 순서로 기록된 이야기라면, 나도 가방 속 여러 책을 나눠서 읽다 보니 손에 잡히는 순서대로 읽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그리고 집에서 곰국을 끓이면 좀 오래 먹으니까? (단, 아내가 장기간 집을 비울 때)   


“노트에 연필로 글을 쓰는 분은 처음 봅니다.”

헝겊 필통 속에 연필이 그득한 것을 보고 더 놀라워했다. 나도 처음 발견한 기분이었는데 필통 속에 흔한 볼펜 한 자루도 들어 있지 않았다.

커서 우울할 때는 연필을 깎았다. 그리고 편지를 썼다. 나의 글은 시간이 흐르면 점점 희미해져 눌러쓴 흔적만 남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웠다. 사라지는 것들을 사랑했다. 내게 리포트를 맡기던 친구가 블랙윙 602 연필을 두 타스 선물했다. 사각사각 부드러웠다. 

- 미오기전 「소멸의 아름다움」 중에서, p.276


이제야 오해가 풀렸다. 미옥샘은 연필을 사랑했을 뿐이다.

나에게 연필은 가볍게 쓰고 지울 수 있는 그런 추억이 있다. 때로는 연필로 쓴다고 선생님께 야단을 맡기도 했다. 고쳐 쓸까 봐 그러셨나? (이런 鳥島~ 에이치 비(HB), 사비(4B)라 외쳤다.) 사랑은 연필로 쓰지 말자! 틀리면 지운다고 생각할 정도로 확신이 없다면….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으니까….


기억하라, 함께 지냈던 행복한 나날을

그때 태양은 더 뜨거웠고

인생은 행복하기 그지없었지

마른 잎을 갈퀴로 긁어모으고 있다

-자크 프레베르Jaques Prevert 「고엽Les Feuilles Mortes」



#미오기전 #이유출판 

#북토크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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