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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강훈 Oct 16. 2024

왜 그렇게 망설였을까?

“여보, 나 퇴근 후 운동하고 오늘은 곧바로 집에 들어갈게.” 

한동안 배드민턴에 미쳐 살았다. 친구의 소개로 결혼 전부터 열심히 하던 운동이라 손을 놓지 못했다. 실력은 좋지 않았지만, 구력으로 간신히 동호인 단체에서 버티는 중이었다. 사실, 운동보다는 단체에서 동호인 생활을 더 즐겼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운동을 핑계로 퇴근 후 집을 비우기 일쑤였으니 그런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운동을 마치고 땀을 흘렸기에 시원한 맥주가 생각이 날 것이고, 술을 한잔하다 보면 혼자 집에 있는 아내를 깜빡할 때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쥐 죽은 듯이 땀 냄새와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던 철없던 남편이었다. 운동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면 그것은 아내를 집에 혼자 있게 한 것이다. 결혼 후 운동을 같이하고 싶어 권유도 해봤지만, 취향과 관심도의 차이로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이 없다면 나의 선택은 절제하든지 일단 멈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제 속에서 나의 운동은 계속되었다.      




2016년 8월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평소와 같이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씻고 살금살금 기어가서 아내 곁에 누웠다.

“왔어?”

“응.”

“일찍 좀 다녀라.”

“응.”

미안한 마음에 눈치를 보면서 길게 이야기를 못 꺼냈다. 빨리 자야지 싶어 눈을 감았다. 아내가 고민이 있는지 자꾸 뒤척인다. 이상한 분위기 속에 아내의 기분을 확인하기 위해 한마디 건넸다.

“이 침대는 옆 사람 움직임이 전달 안 되는 침대라며?”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여보, 잠이 안 와?”

“아니, 잠이 와.”

“아닌데. 뭔가 할 말 있지? 말해봐. 혹시 그거라면 운동 이번 달까지만 하고 안 나갈게.”

한동안 조용히 천장을 쳐다보던 아내가 뭔가 결심한 듯 나에게 한마디 했다.

“여보, 사실은”

“그래 실은, 당신 이름이지.” 아내의 이름은 ‘금실’이다.

아내의 눈에서 대포동 미사일이라도 금세 나올 듯하여 입을 꼭 다물었다. 아내의 네 자매들은 ‘실’ 자 돌림이다. 연실, 명실, 남실, 금실 순이다. 북한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이지만 한국에서는 촌스럽게 느꼈는지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이 부끄러워 항상 개명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름에서 짐작 가듯 막내 ‘금실’은 아들을 바랐던 장모님의 마음이 녹아 있다. 아내가 태어난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장모님은 넷째도 딸이라 사흘 동안 젖도 안 물렸다고 한다. 꼴도 보기 싫어 장모님 입에서 아이를 갖다 버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장인어른은 “남의 집에 주더라도 목숨은 건져서 줘야 하지 않겠소.” 장인어른은 미음을 몰래 먹이고 있었고 키우지 않더라도 살리고 싶었다. 일주일 뒤 초롱초롱한 검은 눈망울을 본 장모님은 내 새끼를 남에게 줄 순 없다며 그제야 젖을 물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 남한이나 북한이나 남아를 선호하는 분위기는 비슷하였다. 그렇게 아내 금실은 장모님이 얻은 마지막 출산 실적이 되었다. 훗날 훌쩍 커버린 아내는 엄마에게 한마디 하였다고 한다.

“엄마는 딸을 셋이나 낳고도 왜 또 자식을 낳을 생각을 했어? 그것도 북한에 살면서···.”

“나라가 이렇게 먹고살기 힘들게 될 줄 몰랐다.” 돌아오는 엄마의 씁쓸한 한마디였다.     




훌륭하신 장모님 덕분에 ‘실(實)’ 없는 남편이 ‘실(實)’ 있는 아내와 살게 되었다. 정적이 흐른 후 아내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경청하고 있다.

“중국에 계시는 엄마가 걱정돼서 모시고 와야 할까 봐.”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해야 했다. “그래, 당연히 모시고 와야지.”라고.

하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왜? 무슨 일 있어?”라고 되묻고 말았다.

몇 초간 고민하며 망설이는 나의 모습을 보인 것이 지금도 후회된다. ‘우리는 종종 지난날을 후회하며 탄식한다.’라고 들 하는데 난 그 지난날이 이날이지 싶다.

장모님은 탈북 후 신분증 없이 하루하루 불안하게 중국 생활을 이어 가셨다. 시간이 지나 무사히 한국 땅을 밟으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생을 중국에서 마감할 각오로 다시 중국으로 떠나셨다고 한다. 막내딸의 결혼식에도 오시지 못할 만큼 중국에서 삶을 고집하신 사연이 있었다. 한국 국적 신분으로서 여행비자로 중국에서 살고 계셨지만 불안함은 감출 수는 없었다. 한때는 중국 내에는 괴기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탈북자들에게 중국인 신분증을 발급해 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명백한 거짓이었다. 중국 내 탈북자들을 색출하려는 꼼수였다. 사탕발림에 혹하여 모습을 드러낸다면 영락없이 북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모님의 신분은 한국 사람이지만 말 한마디 내뱉는 순간 누가 들어도 북한 사람이다. 걱정되었다. 당시에 중국 내 한국인에 대한 인식도 썩 좋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한국 내 사드 배치를 이유로 한중 관계가 악화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아내는 장모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악의 경우 잘못 연루되어 북송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를 모시고 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아내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하던 나였다. 당시에는, 특히 한국인은 중국 비자가 발급되지 않는 상황으로 우리 부부가 직접 모시러 갈 수도 없었다.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서 매일 같이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을 그녀였다. 아내의 물음에 1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지 못한 나를 원망했다. ‘머리로 생각하더라도 말이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는 아내의 잔소리가 귓가에서 맴도는 듯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장모님을 모셔 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몇 날 며칠 고민하였고 전화벨 소리는 쉴 틈이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쯤 끝내 아내가 방법을 찾았다. 수소문 끝에 중국에 사는 지인을 통해 한국 영사관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연세가 있으셔서 제때 비자를 연장하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분류되어 벌금을 내고 강제 추방을 당하는 방법이었다. 우리로서는 망설임도, 선택지도 없는 상황이었다. 적지 않은 금액의 벌금을 내고 중국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결과야 어떻든 무사히 한국으로 오는 것 목적이었기에 그깟 벌금은 대수롭지 않았다. 장모님께서는 중국인 장인어른과 생이별해야 했고, 두 번 다시 중국을 방문할 기회를 잃었지만, 당시에 우리에게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믿었다.       




장모님이 출국장에서 비행기를 타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지막 통화였다. 장모님이 입국하시는 날 연차를 내고 진주에서 인천공항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장모님은 휴대전화가 없어서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전광판에 비행기 도착 표시가 보였다. 저 비행기에 무사히 탑승하셨으면 우린 만날 수 있다. 잠시 후 국제선 입국장 문이 열리고 멀리서 검게 탄 피부와 주름살 가득한 노파의 잔걸음을 보고서야 긴장을 겨우 풀었던 기억이 난다. 장모님과 힘겨운 재회였다.

“장모님 여기요.”

“사위 왔는가?”

장모님도 긴장이 풀리셨는지 날 꼭 안아주시더니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셨다. 딸은 엄마의 어깨를 토닥토닥한다.      

“수고했어, 할멈!”        

지금도 곁에서 잘 모시고 있는 막냇사위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외로움 사무치던 아내에게 빛처럼 다가온 가족이다. 그리고 장모님을 우리의 보금자리로 모시고 나서부터 코트를 누비던 배드민턴을 망설임 없이 그만두었다. 퇴근 후 가족이라는 코트 속에서 장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배드민턴 동호인들과 땀 흘리는 것보다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가끔은 생각난다. 운동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수고했어,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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