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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강훈 Apr 17. 2024

씨암탉은커녕 달걀도 못 얻어먹겠다

삶 속으로

나는 처형이 세 명이나 있다. 하지만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했다. 언젠가 만날 날을 기다리며 그리움 속에서 처형(妻兄)들을 생각하곤 한다. 장모님의 말씀으로는 딸 넷 중 지금은 막내만 곁에 있지만 첫째와 둘째는 중국에서 생이별했다고 하셨다.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하셨다. 타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지만 딸들이 눈앞에 멀어져 가고 영영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상상은 못 하셨으리라. 나의 글로써 도저히 그 심경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지만 상당히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고 한다.     




내 아내가 열여섯 살이 되는 해였다. 추운 북녘 나라의 사회주의 체제 속 고난의 행군의 시절이었다. 장인어른이 쉰 살이 되기도 전에 일찍 돌아가시고부터 배급은 이내 끊겼다고 한다. 장모님 홀로 네 딸을 먹여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삶이었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아사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 당시 장모님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목숨을 건 긴 여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굶어 죽으나 총에 맞아 죽으나 같지, 다를 게 없어.”

“배를 곯지 않고 하는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일도 아니여.”     


웃음기 없는 장모님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나의 심금을 울렸다. 내가 연거푸 물어볼수록 목이 메며 가슴 아파하는 장모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셋째는 아직 고향 청진에 남아 있다. 자신의 선택을 목숨과 바꿀 수 없었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연락은 전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딸들을 다시 만날 거라는 믿음 속 간절한 바람으로 중국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오셨다. 막내딸과 함께….     



지금은 한국에서 잘 살고 계시지만 한 때는 중국에 다시 들어가 딸들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꿈적도 안 하신 분이다. 중국인 새 장인어른과 함께 살면서 내가 죽을 자리가 여기라고 말씀까지 하셨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기면서 중국에서의 삶을 끝까지 하시지는 못했다. 결국, 우리 곁에서 잘살고 계시지만 여전히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장모님의 시간은 두 딸을 잃어버린 그 순간에 멈춰 있었다.     

결혼 전 중국으로 인사드리러 갔을 때 장모님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검게 탄 얼굴에 짧은 단발머리, 지나간 세월을 이야기하듯 이마에 주름은 수를 놓은 듯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장모님은 한국 국적 신분으로 중국에 살고 계셨다.     


“안녕하십미꺼. 장모님, 예비 사위왔슴미더”

“어서오시라요”

“절 받으시지예”

“그냥 앉기요”     


함경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어우러진 구수한 분위기 속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던 장모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늙고 힘없는 노인이지만 젊은 시절의 장모님은 아주 강인한 분이셨다. 동네잔치 하듯 집안의 온갖 음식들이 차려지고 손님들이 한분 한분 찾아오셔서 예비 사위를 반겨주는 분위기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관심사는 나에게로 집중이 되었다. 중국인 장인어른과 간혹 조선족 이웃 주민들이 와서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차례차례 나오는 음식들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농담 섞인 말투로 한마디 거들었다.


“장모님 씨암탉이 없네예? 하하”


돌아오는 건 묵묵부답. (TV였다면 CG로 까마귀가 몇 마리 울면서 내 머리로 날아갔겠지.) 

분위기 싸해지는 이 느낌 뭐랄까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훗날 아내에게 물어보니 북녘 나라와 중국에서는 그런 문화가 없단다. 언젠가 보답할 기회를 주시겠지 하며 큰 대접을 받고 돌아왔던 감사한 시간이었다. 내가 장모님을 잘 모셔야지 하며 공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다행히 지금은 곁에서 잘 모시고 있다. 장모님께서 만족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위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장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한 번은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가끔 우스갯소리로 장모님께 여쭤보았다.     


“장모님 그때 씨암탉을 못 먹어서 참 아쉬웠어예. 하하”

그게 뭔 큰 대수라고 말씀드렸을까? 나도 참 못났다. 그 후로 며칠 뒤 저녁 무렵 현관에서 벨 소리가 울린다. 

 

“치킨 왔습니다.”

“여보, 치킨 시켰어?”

치킨을 받아 들고 이내 거실에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얼른 음식을 꺼냈다.

“장모님치킨이네, 우리가 시켜 먹던 집이 아닌데.” 하며 나는 투덜거렸다. 그 상황을 알 리가 없다. 아내는 장모님을 한번,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응, 엄마가 주문하라고 해서 주문한 거야. 장모님 사랑은 치킨인 거 몰라?”

항상 옳다. 치킨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사위가 매번 씨암탉 노래를 불러서 장모님은 아내에게 닭을 시켜주라고 하신 것이다. 물론 ‘장모님치킨’의 센스는 아내 작품이다. 처가에서 잡은 닭은 못 먹었지만, 이날 나는 사위 사랑이 듬뿍 담긴 장모님 치킨을 먹을 수 있는 행운아가 되었다. 명절이 되면 처가에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친구들을 보곤 했다. 하지만 난 가끔은 부럽다. 그럴 때면 아내의 가족과 함께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 속에 그려보기도 했다. 처가에서 처형들이 음식을 담은 상을 내오며 내 주위에 둘러앉았다. 장인어른과 난 마주 앉아 술 한 잔 따라 드리고 있다. “장인어른 한 잔 받으시지예” 하고 말이다.      




퇴근길에는 장모님께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보답하고 싶다. 표현이 서툴고 방식이 다를 뿐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같다. 따뜻한 마음이 어우러져 함께하는 우리의 소중함을 간직한 채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장모님은 내가 축구 경기를 볼 때면 한 번씩 닭을 시켜주시곤 하신다. 이만 원을 아내 몰래 슬쩍 건네주실 때는 기분이 최고다.

다음에는 ‘처갓집양념치킨’이다.


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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