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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강훈 Apr 18. 2024

내 사위는 미나리

삶 속으로

“엄마, 오늘 집에만 있을 거야?” 아내는 늘 곁에 있는 장모님이 많이 걱정된다.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큰 짐이 있기 때문이다. 늘 강하고 씩씩한 모습만 보다가 오늘따라 가엽기 그지없다. 장모님의 얼굴에 수놓은 주름살은 마음을 더욱 찡하게 한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듯이 가슴 깊은 한 구석에는 큰 응어리가 스며들어 후벼 파고 있었다.

“엄마, 나 따라갈래? 우리 전에 갔었던 동네에 가볼래? 그 동네는 경치도 좋고 개울도 흐르고 미나리도 많을 것 같은데? 엄마 나랑 가보자. 집에만 있으면 뭐하누? 콧바람 좀 쐬고 들어오자. 응?” 아내는 엄마가 집에서 우두커니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뭐라도 했으면 싶은 심정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잊게 해 주기 위함이다. 아내가 아니라면 방구석에 앉아 흐르는 눈물로 그려온 흩어진 나날들만 떠올리고 계실 장모님이었다.

“그래 나가 보자. 고서방은 언제 온다는고?”

“회사 마칠 때 되면 안 오겠나? 나중에 우리 태우러 오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장모는 아내와 함께 사이좋게 끼니를 챙긴 작은 가방을 둘러메고 서둘러 문밖을 나선다. 엄마의 맘이 변하기 전에 정확한 위치도 모른 채 무작정 밖을 나가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운 좋으면 노지에 있는 나물도 채취도 할 수 있다.




장모님과 아내는 종종 함께 바람을 쐬러 나가는 일이 많았다. 그냥 푸른 산과 풀들이 무성한 곳을 찾기 위함이다. 장모님이 살아오신 북녘의 땅과 중국의 산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비슷한 분위기로 옛 추억들을 회상하기 좋은 장소들이다. 장모님이 한국에 오셔서 같이 살고 있을 때였다. 창밖을 보시며 나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고서방, 난 산이며, 들이며 풀들이 무성한 곳을 보면 숨통이 트이네”

그런 분을 답답한 아파트에서 같이 살자고 했으니 내가 아주 무심했다. 그렇다고 장모님을 모시기 위해 귀촌을 하거나 도시 외곽의 구석으로 이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 년 동안 장모님을 모시면서 늘 노심초사 눈치를 봐야만 했다. 집 안팎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에 종일 지나간 사극 드라마 ‘허준’, ‘동이’, ‘이산’을 보시며 하루를 보내시는 것이 다였다. 똑같은 드라마만 보시는 것이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었다. 우리는 재방송은 잘 보지 않는 편인데 장모님은 두 번, 세 번 횟수와 상관없이 같은 사극만 보셨다.

“왜 같은 것만 보십니꺼? 전에 보셨던 회차 같은데예?” 하며 여쭤보면 장모님은 나를 보시며 웃음으로 넘기신다. 늘 눈으로 대답하셨다. “그나마 이해하는 것이 사극이야. 그리고 이게 제일 재밌어”하고 말하는 듯 느껴졌다. 훗날 실제로 여쭤보니. 내 말이 맞았다. 그나마 정서적으로 공감이 가는 것이 시대극이었다. 조선 시대 역사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얼추 비슷하게 배우고 있다. 




드라마 시청 외에는 큰 즐거움을 못 느낀 장모님은 늘 갑갑해하셨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장모님을 모시고 근교의 농촌 분위기가 물씬 나는 마을로 바람 쐬러 간다. 무작정 택시 기사님께 안내를 요청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용케 잘 찾아다녔다. 퇴근 무렵에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 여기가 어디더라? 사촌(沙村)인가 그렇다네”

“마치고 데리러 올 수 있나?”

“응, 마치고 바로 데리러 가께”

가끔 아내의 전화를 받을 때면 퇴근 후 아내가 알려주는 곳으로 찾아간다. 나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다. 대부분 촌길이다. 비닐하우스도 보이고, 논도 보이고, 도랑도 보인다. 내비게이션도 헷갈리는 이런 촌구석을 어떻게 찾았는지 신기할 정도다. 순간 가슴속을 후벼 파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맞다. 잊고 있었다. 몇 날 며칠을 어둠 속 산길을 헤매며 북한 땅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두 여인, 중국 산속 깊은 곳에 숨어 살았던 두 여인이었다. 저기 멀리서 장모님과 아내가 포대를 한 자루씩 둘러메고 온다. 얼핏 봐도 한가득하다. 두 사람의 모양이 더 가관이다. 몸빼바지에 발목 장화를 신고 머리엔 모자, 목에는 수건을 걸치고 있다. 딱 봐도 영락없는 농사짓는 이 동네 주민이다. 

“머꼬? 머그리 마이 캤노?”  

“잘 찾아왔네. 이거 미나리다”

“엄마랑 나랑 둘이 이만큼 캤다. 내일 또 올끼다. 내일 갈 때는 오빠가 태워줄 수 있나?”

“어, 그래.”, “새벽에 말이제?”

근데 저 많은 미나리는 어쩔 셈이지? 난 순간 미나리가 걱정되었다. 언뜻 봐도 직접 먹는다면 한 달은 족히 먹을 양이다. 영화 ‘미나리’를 찍을 판인가? ‘한 달간 미나리만 먹다가 초록 똥을 싼 남편 이야기’라고 제목을 정하면 되겠다. 물론 영화로 만들 순 없겠지만 미나리와 삼겹살, 미나리와 대구탕, 미나리 초무침, 미나리나물, 매운 찜 등 미나리로 할 수 있는 모든 요리들을 생각하며 혼자 심란하다. 아, 이것은 내 몫이구나 하며 긴장할 찰나였다.

“근데, 저 많은 미나리 우짤낀데?”

“엄마랑 둘이 중앙시장에 가서 팔 거야”

“그래 알았어. 내가 시장에 태워다 줄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두 여인은 신이 났다. 마치 자기들이 농사지어 수확한 듯 기쁜 나머지 포대에 한가득 채워진 미나리를 온 집안에 풀어놓았다. 미나리를 씻고 헹구고 지친 기색은커녕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앗, 거머리”

“떼라”

그녀들의 대화에 낄 틈도 없다. 저녁은 내가 준비한다고 겨우 한마디 거들었다. 저녁을 맛나게 먹고 다들 일찍 잠이 들었다. 중앙시장은 새벽 일찍 나가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떤다. 도대체 미나리가 뭐 길래? 저렇게 열심일까?

눈치 없는 사위는 알 리가 없다. 오로지 삼겹살에 미나리를 올려 먹을 생각뿐이다. 한동안 그녀들의 미나리는 집안을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그냥 한두 번 나가고 말겠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들에게 미나리의 향기는 단지 코와 입으로 느끼는 향기만은 아니었다.

장모님과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사위보다 더 나은 미나리가 고맙고, 초록의 싱그러움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미나리라서 더욱 고맙다. 네 딸들과 미나리를 캐고 있을 상상을 하시면서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서든 잘 자란다는 미나리, 장모님이 두고 온 고향에서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영화 속 ‘미나리’처럼 이민자의 삶 속에 느꼈던 가족의 소중함과 꿈을 잃지 않도록 희망의 메시지를 안겨주고 있었다. 장모님에게 미나리는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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