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아빠 일기 - 12편(25년 12월)

언젠가 만날 "억울함"에 대해

by 강남 아빠 일기

아들, 얼마 전 아빠는 또 한 번의 자동차 사고를 겪었어. 강남 아빠 일기 3월호에 쓴, 수영장 사고[1] 이후 또 한 번의 감가상각 요소야. ㅠㅠ


아빠는 직진 중이었는데, 옆차가 갑자기 차선변경을 하다 우리 차 옆을 그대로 들이받았어.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어. 다행히 충격량이 큰 사고는 아니었어. 차에 타 있던 엄마와 너도 크게 동요하는 눈치는 아니었지.


사고를 낸 상대방은 고령의 여성 운전자였고 운전미숙이 직접적인 사고 원인이었지.


상황은 아주 명확했고, 2개 보험사에서 모두 우리 차가 '피해 차량'이라 판정했어. 그런데 결과는 과실 7대 3. 아빠도 30퍼센트의 책임을 받아들여야 했어.


억울하다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야. 아빠는 잘못한게 없었으니까. 보험사에 억울함을 토로해보기도 했지만 어쩌겠어. 교통사고가 날 그 시간 그 자리에 우리가 있었던 것이 죄였던 거지.


이번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생각을 하게 됐어.

내 책임이 아니어도, 내가 감당해야 할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생에는 항상 이런 순간들이 있다는 것.

이번 12월호에서는 이런 생각을 중심으로 글을 써볼까 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2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빠는 올해 F1 시즌의 한 장면이 떠올랐어.

맥라렌의 드라이버, 오스카 피아스트리의 카타르 그랑프리야.


그 주말은 피아스트리가 시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완벽에 가까운 흐름을 보여준 순간이었어.

스프린트 퀄리파잉 1위, 스프린트 레이스 1위, 그리고 본 레이스 퀄리파잉 1위까지 차지하며 폴포지션에서 누구보다 앞에서 본선 레이스를 시작할 수 있게 됐어.


한 그랑프리를 위해 드라이버가 할 수 있는 준비와 실행은 거의 모두 해낸 주말이었지. 본선 우승 빼고 말이야


하지만 레이스는 피아스트리가 원하던 폴 투 윈으로 흐르지 않았어.

세이프티카가 나왔고, 피트스탑 전략이 엇갈렸지. 결국 피아스트리는 우승이 아닌 2위로 레이스를 마쳤단다.

“Speechless. I don’t have any words.”

레이스가 끝난 뒤 피아스트리의 팀 라디오야. 말문이 막혔다고, 할 말이 없다고.


이 짧은 문장 안에 그가 느꼈을 허탈함이라든가 억울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았어. 피아스트리가 분명히 우승할 수 있는 페이스와 기량을 갖췄는데, 누가 봐도 전략 미스로 2위를 했거든. (실제로 아빠도 카타르 그랑프리를 생중계로 봤는데 피트스탑 전략이 큰 실수였어)


레이스 이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단다.

“I drove the best race that I could… there was nothing left out there.”[2]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레이스를 했고, 트랙 위에 더 남겨둔 것은 없었다."

핑계도, 변명도 없었어.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은 다 했는데 결과가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차분히 받아들이고 있었지.


난 아무 잘못 없는데?

피아스트리는 그 주말 카타르 그랑프리에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전략팀이 요구한 대로 레이스를 마쳤을 뿐이야. 하지만 그 사실이 레이스 2위라는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지.


아빠의 사고도 그랬어. 누가 원인을 제공했는지 상황이 아주 명확했지만 사고 책임의 일부는 아빠가 감당해야 했어.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 더 억울한지가 아니었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도 어떤 결과는 결국 내 몫으로 남는다는 것.


그리고 그런 순간은 인생에서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고 이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삶의 궤적이 정해진다는 것이었어.


피아스트리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나 봐. 인터뷰에서 다음 레이스에 어떻게 임할 거냐는 물음에 이런 얘길 했어.

“I’ll just try and drive how I did this weekend. That’s all I can do.”
"이번 주말에 했던 것처럼 달리려고 할 뿐이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시즌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는 서사

피아스트리는 다음 레이스에서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2025년 드라이버 챔피언이 되지 못했어. 그렇지만 그가 카타르 그랑프리에서 보여준 결연한 의지는 아빠 마음에 오래 남았어.


결과를 바꾸겠다는 말도 아니고, 누군가를 탓하겠다는 말도 아니었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계속 가겠다는 선언이라 그렇게 느껴졌어.


아빠뿐만 아니라, 피아스트리를 응원하는 모든 팬들이 그가 보여준 성숙한 모습에 감명받았어. 그리고 수많은 F1팬들이 피아스트리가 이런 태도로 계속 레이스에 임한다면 결국 드라이버 챔피언에 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


그가 더 좋은 드라이버가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가 된 거야. 이번 시즌은 끝났지만, 그의 서사는 이제 다시 시작되는 거지.


씁쓸한 사실을 받아들였을 뿐인데

아빠도 이번 사고를 겪으며 비슷한 경험을 했어.

‘인생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니 신기하게도 일이 부드럽게 정리되기 시작했단다.


수리를 맡은 공업사도, 보험사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주셔서 감사한 마음뿐이었어.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사고가 잘 처리됐고 아빠는 크게 스트레스받지도 않았어.


아주 높은 확률로 내년도 보험료가 오를 테지만 뭐 어쩌겠어? 보험계리율이라는 대수의 법칙 앞에선 아빠도 하나의 데이터일 뿐인 것을.


그 과정을 통해 아빠는 한 가지를 또 느꼈단다.

내 책임이 아니어도, 내가 감당해야 할 결과는 있고,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다음 장면이 열리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다가오는 이 '다음 장면'이야말로 우리가 더 집중해야 할 삶의 순간이라고.


그럼에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들, 네 인생에도 네가 원하지 않았고 네 책임도 아닌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올 거야.


그때 억울해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억울할 수 있고, 속상할 수도 있어. 다만 이것만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결과가 공정하지 않아도 네 태도까지 빼앗길 필요는 없다는 것.

피아스트리처럼 할 수 있는 몫을 다 한 뒤에도 옳다 믿는 방향을 놓지 않는 사람으로 남는 것.

아빠처럼 상황을 받아들인 뒤에야 일이 풀리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는 걸 알아두는 것.


이번 사고는 우리의 소중한 차에 가해지는 또 하나의 감가상각이었지만, 그래도 무사고를 위한 내년 다짐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했어. (내년에는 정말 차 사고와 관련된 글은 안썻으면 좋겠다!ㅋㅋ)


아들,

인생은 가끔 아무 설명 없이 우리를 시험하지만, 어떤 사람으로 남을지는 네 선택이란다.


잘 놀다가도 낮잠 자러 갈 시간이 되면 억울하게 흐느끼는 너를 보며,

2025년 12월 26일 금요일



[1] 강남 아빠 일기 - 3편(25년 3월) 실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https://brunch.co.kr/@gangnamdaddiary/57

[2] 2025 Qatar Grand Prix Post-Race Interviews, https://youtu.be/CDc4qF0-8Hg?si=q2mj9ObXktZZaeRJ&t=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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