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병은 왜 초록일까?
술지게미 봉지를 들고 퇴근하던 아버지는
초록 숲 어디선가 누룩 냄새를 풍기고 있을 거야
관찰일기/2025/4/20
메론빙수 :
말수가 줌.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짐.
밤낮 구분 없이 수면시간이 많음.
처치곤란에 대한 적대감이 있음.
성격이 예민함.
부엌에서 음식을 가져다 먹는 게 뜸해짐.
물을 자주 마심.
……
처치곤란 :
내성적임.
깡마른 체형.
메론빙수와 자주 다툼.
알코올 금단 현상을 보임(손을 떨고 말을 더듬음).
수면시간이 많아짐.
몸이 많이 마름.
……
“휴”
관찰일지를 쓰던 사라는 펜을 내려놓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민중이 그렇게 가고 나서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모든 걸 공유하고 어떤 일에도 서로를 비난해 본 적이 없던 죽마고우에게 상처를 입었고 더불어 상처를 입혔다. 애초에 이 일이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이제 세상에 처치곤란, 메론빙수 그리고 자신만 남은 것 같았다.
더 외로워졌다는 생각에 우울했지만 화단에 있는 저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슬렀다.
쓰다만 관찰일기를 계속하려고 펜을 든 순간이었다. 갑자기 발코니에서 우당탕 소리와 함께 메론빙수의 비명이 들렸다. 사라가 뛰어갔다. 처치곤란은 어안이 벙벙한 채 놀라서 흙 위에 주저앉았고 메론빙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 저리 가! 이 새끼들아! 이 드러운 것들!
내가 아직도 네들 상대로 빌어먹고 사는
벌레 같은 년으로 보여?”
그녀는 급기야 자신의 웃옷을 찢었다. 생기 없이 늘어진 젖가슴이 드러나고 퍼석해져 갈라진 피부가 연민을 느끼게 할 정도로 초라했다. 눈을 크게 뜨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고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급해진 사라는 화단으로 올라가 메론빙수의 옷을 추스르고 버둥거리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그녀의 몸을 잡았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 건지 도무지 그녀의 발악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사방으로 흙이 튀었다. 처치곤란도 사라도 온몸에 흙을 뒤집어썼다.
그때였다. ‘찰싹’하고 매섭게 부딪는 소리가 났다.
주저앉아 몸을 뒤로 빼며 겁에 질려있던 처치곤란이 벌떡 일어나 메론빙수의 뺨을 세게 후려친 것이다.
엉망이 돼 있던 세 사람은 순간 움직이지 않고 정적 속에 놓였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메론빙수는 후끈거리는 한쪽 뺨에 두 손을 포개어 놓고는 작은 흐느낌으로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짐승이 아닌 사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라는 물수건을 가져와 메론빙수의 몸을 닦아주고 머리를 단정히 빗겨주었다. 망가진 옷을 벗기고 자신의 옷을 가져다가 입혀주었다.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베란다 창을 열어 맑은 공기를 들였다. 밖은 깜깜했고 폭풍이 지나간 세상은 다시 조용해졌다.
“꿈을 꿨는데, 정말 현실 같아서 무서웠어. 그런데 전에는 그게 진짜 현실이었는데 지금은 악몽이네. 진상이 끝이 없어서……, 미안해서 어째.”
메론빙수의 입에서 ‘미안’라는 말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바다에서 오래 수영을 하고 나온 사람처럼 몸에 진이 다 빠져 있었고 말이 늘어지고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화단에 나무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게 신기했다.
“우리, 같이 술 한 잔 할까요?”
정적을 깬 사라의 명랑한 목소리에 처치곤란은 본능적으로 침을 꼴깍 삼켰고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던 메론빙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거 규칙에 어긋나는 거 아녜요? 계약서에 하도 하면 안 되는 것들만 잔뜩 들어있어서……, 그래도 뭐 주인장이 좋다면야…….”
술 생각에 연거푸 침을 삼키는 처치곤란이 괜스레 너스레를 떨며 사라의 눈치를 보았다.
“거 쓸데없는 소리는 왜 해?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나 지금 이쪽에 감각이 없어. 술 한 잔이 아니라 술도가지를 들이부어도 분이 안 가실 판이야.”
벌게진 한쪽 뺨을 처치곤란에게 내밀면서도 메론빙수의 입꼬리는 기대와 즐거움으로 자꾸 귀 쪽으로 당겨졌다.
사라가 소반에 소주병과 잔, 그리고 몇 가지 안주도 같이 담아서 화단 위에 놓았다. 처음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술을 따르고 잔을 부딪쳤다.
“캬아!”
소주 한 잔이 목으로 넘어가자 처치곤란은 온몸을 떨며 화답했다.
“쥑인다!”
구운 북어포를 씹으며 메론빙수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근데 이상하다. 술이 왜 이렇게 쓰지? 입맛이 변했나? 한 잔 마셨는데 두 잔 생각이 안 나네.”
고개를 갸웃하며 처치곤란이 말했다.
“자기 알코올 중독자 맞아? 승리했네, 죽기 전에 술 끊고 새사람 되겄어.”
메론빙수의 비아냥에 처치곤란이 인상을 쓰자 그녀는 자신의 붉은 뺨을 다시 그에게 디밀었다.
“이제부터 나 우리 주인장한테 말 놓을래. 나보다 한참 동생 같은데. 괜찮... 지?”
사라는 메론빙수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술이 들어가니 우리 애들이 보고 싶네요. 많이 컸을 텐데, 아마 내가 기억하는 얼굴하고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처치곤란의 눈이 촉촉해졌다.
“아이들 이름이 뭔가요?”
사라가 물었다.
“줄기, 잎새, 열매”
사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쩜, 정말 예뻐요.”
“사라 씨 이름도 예뻐요.”
처치곤란이 사라의 눈을 피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뭐냐 뭐냐, 지금 이 분위기……, 계약서에 한 개 더 추가해야겠어. 사내 연애 금지!”
메론빙수의 말에 사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메론빙수는 그녀의 천진하고 착한 웃음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 엄마 이름은 봉선화예요. 작은 화원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애들 이름도 그렇게 지었어요”.
사라가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사실 원래 제 이름은 사라가 아니에요. 사랑이었어요.”
“그럼 개명? 사랑이, 그 이름도 예쁜데 왜?”
메론빙수가 의하한 눈빛으로 사라를 바라봤다.
“살고 싶어서요. 너무나……, 살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