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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희 Nov 19. 2020

책을 써보고 싶나요?

 누구나 글을 쓰면 책을 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주제와 분량, 그리고 어느 정도 자금만 있으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책을 받아 들고 기쁨에 몸부림 칠 수 있는 영광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실정을 모르는 주변인들은 네가 언제부터 글을 썼냐며, 어떻게 책을 출판했냐며,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곤 하는데 사실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내 첫 책을 대충 훑어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수준 미달의 글 같지 않은 글도 책으로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출판업계의 질을 흐려 미안합니다).

 

 자비출판으로 나온 책 속의 글들은 오로지 저자의 역량이다.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내야 하는 자비 출판의 특성상, 그 속에 담길 글의 퀄리티는 보장할 수 없다. 편집자가 없는 것은 물론, 퇴고 작업이란 것도 말만 들어봤지 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몇몇 지인들에게 한 번 쓱 보여주고는 맞춤법 정도만 확인하고 바로 출판하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 퀄리티란 쌍욕을 안 먹으면 다행인 수준이랄까.      

 

 나와 같이 글을 써보진 않았지만 책을 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충분히 가능하니까. 아니 무조건 가능하다. 단지 끈기 있게 글을 써야만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분량). 그것으로 끝이다. 그렇게 탄생한 책이 잘 안 팔리면(99.9%) 그냥 일생대로 살아가면 되고, 만약 책이 잘 팔리게 되면...... 거기까진 나도 모르겠다. 경험이 없으니.     

 

 처음으로 책을 출간하게 된 동기를 크게 보면 딱 두 가지였다. 과연 내가 쓴 글이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죽기 전에 내 이름이 새겨진 책을 받아 들게 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우울하고 복잡한 심경을 글로 써 내려가기 시작해 우여곡절 끝에 책을 한 권 내게 되었고, 결국 그 피해는 나의 통장잔고와 죄 없는 지인들의 호주머니가 떠안게 되었다. 지인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그런 죄스런 마음에 더욱 가치 있고 좋은 글로 그들에게 보답하리라 다짐하며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다.     


“나 두 번째 책 내려고 요새 글 쓰고 있어.”

“음, 그건 좋지 않은 행동인 것 같아, 친구야, 요즘 돈이 없어.”

“겁먹지 마, 친구야, 저번처럼 막 10권씩 강매하지는 않을게.”     

 

 처음으로 책에 대한 모든 작업을 끝내고 인쇄가 되기만을 기다렸던 한 달간의 시간들이 기억난다. 하루빨리 집으로 배송되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그 마음은, 아마도 뱃속의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새겨진 책을 두 손으로 직접 펼쳐보는 장면을 수 없이 떠올리곤 했다. 중고생 시절 우연히 값비싼 게임 아이템을 획득했을 때나, 좋아하던 이성이 내 고백을 받아 줬을 때, 혹은 고대하던 군대 전역 날의 아침. 그런 종류의 짜릿함과 견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그 무엇을 상상해도 겪어보지 않고는 모를 일.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화창한 날, 달콤한 택배 기사님의 목소리를 듣고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마주한 내 책과의 첫 만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신이시여, 이것이 정녕 내 자식이란 말입니까.’     

 

 전체적으로 밝은 브라운 색이었던 앞표지는 진한 갈색이 되어 어둡게 변해있었고, 선명했던 이미지도 흐리멍덩한 것이 내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모니터로만 보던 이미지가 인쇄과정을 거치면서 한 단계 톤다운되었고 선명도 또한 줄어든 것이다. 빛나는 하트 모양의 태양 아래 두 남녀가 기대어 앉아 있던, 화사하고 따뜻했던 이미지는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어둑어둑한 모양새가 마치 벤치에 앉아 있는 커플이 아니라 방금 막 부활한 좀비 두 마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어디까지나 원본과 비교해서).

 악을 쓰며 머리를 쥐 뜯었지만 엎질러진 물인데 어찌 담겠는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혀 긍정의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열매가 못생기고 탐스럽지 않다 하더라도 그 또한 나 자신이자 내가 맺은 노력의 결실이니까.     

 

사실 표지보다는 안에 담긴 글들의 수준이 심각함...


 한동안은 해냈다는 성취감과 만족감을 흠뻑 느끼며 지냈다. ‘상상만 해오던 책이 내 눈 앞에 있구나, 내가 이걸 써내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 볼 때마다 그동안 책을 쓰며 힘들었던 기억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진 못하더라. 이따금 잠자리에 누워 내 책을 읽다 보면 자괴감이 밀려 들어와 허공에 이불 킥을 날리곤 했다. 가스 불에 구워지는 오징어보다도 오글거리는, 독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책처럼 느껴졌다.

 아, 내가 이런 책을 겁도 없이 남들에게 홍보하고 다녔다니. 지인들에게 제발 좀 읽어 주십사 애원했던 지난날들이 후회스러웠다.        

 

 어설프고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글이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기분은 설렘보단 두려움이다. 이 책은 내가 온전한 정신 상태에서 쓴 글이 아니라고, 내가 쓴 글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며 온갖 핑계를 대서라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기대하는 동물인지라 평가받기를 원한다. 그것도 좋은 평가만을 원한다.

 한동안 기대감과 두려움의 공존, 그 상반된 감정을 품고서 지인들에게 평가를 요청했다. 모르는 사람이 썼다는 가정 하에 아주 솔직한 평가를. 반응은 내 예상보다 가지각색이었다. ‘도저히 못 읽어 주겠다(가장 많았음)’부터 ‘우울하다’, ‘나쁘진 않다’, ‘너무 좋았다’ 등등, 그런데 그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평가가 하나 있다.      


“글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네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거잖아, 그게 멋있는 것 같아.”      

 

 사람들은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망설인다. 이유가 뭘까. 왜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걸까. 보통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땐 현재의 상황이나 환경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 최소한의 여건이라도 마련되어야 시작이라도 해보지, 시작은 고사하고 해보려는 시도조차 억눌러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치부했다.

 그런데 나중에 돌이켜 보니 그건 ‘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무언가 ‘되고 싶은 것’이었다. 사실 ‘하고 싶은 것’은 그냥 하면 된다.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하지만 무언가 되고 싶기에 우리는 지레 겁을 먹고 주저하게 된다. 이를테면 좋은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 되거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거나, 멋있는 뮤지션이 되거나 하는 것들은 쉽지 않으니까.

 무언가 된다는 것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분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재능과 운도 필요하다는 것쯤은 삶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회적 통념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무언가 되려 하는 마음은 내가 좋아서 시작한 모든 것들을 조금씩 갉아먹었고 마음 편히 즐길 수 없게 만들었다. ‘무언가가 될 수 없다면 결국엔 가치 없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가치를 잃어버렸다.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인간, 결국 나란 사람조차도 가치 없는 인간이라 여기며 매번 스스로를 한심하다 못해 경멸의 눈빛으로 내려다보곤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상처 입혔던 수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나 자신이 안쓰럽다는 연민마저 느꼈다.

 그래서 무언가 해결 방안을 강구해야만 했는데 내가 찾은 방법은 나 자신과의 대화였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고 나름대로의 답변을 낸 후, 왜 그러한 결론이 도출되었는지를 생각해보는 행위. 도출된 결론이 절대적인 정답이라 믿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는, 일종의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무는 그런 종류의 대화였다. 그러던 도중 나는 하나의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 되려는 순간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즐길 수 있는 사람, 남들 눈엔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로 비칠지는 몰라도 그냥 ‘나’답고, ‘나’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고 싶은 것을 즐기는 사람은 아름답다. 이를테면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친구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수를 꿈꾸며 성공만을 바라보는 사람인지, 온전히 하고 싶은 음악을 맘껏 즐기며 자신을 만들어가는 사람인지. 하고 싶은 것을 즐기는 사람에겐 매력으로 생성된 보호막 같은 것이 주위를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그 매혹적인 보호막은 반짝거리는 빛을 지니고 있었다. 누구도 갖고 있지 않고, 누구와도 구별되는 자신만의 빛이랄까. 남들은 발견할 수 없을지 몰라도 스스로에게만은 의연한 자태로 눈부시게 빛나는 그런 종류의 빛.      

 

 우리 모두가 착각하는 개념이 한 가지 있다. 꿈이란 꾸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룰 수 있다면 더욱 좋을지도 모르지만 꿈이란 것을 가질 수 있고, 꿈이란 것을 꿀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꿈은 그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어쩌면 정말 소중한 가치는 꿈보다 ‘삶 그 자체’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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