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화양연화 4
홍콩의 야경을 처음봤을 때 미인을 보는듯 했다.
늦은 오후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고 나왔을 때 접한 홍콩의 첫 풍광이었다.
이 몸 태어날 때 님을 따라 태어나니
한평생의 연분임을 하늘이 모를 일이던가.
나 하나 젊어 있고 님 하나 날 사랑하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가 전혀 없다.
- 정철, <사미인곡(思美人曲)> 중-
어디서 본적있는데? 할거다. 고딩이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접해본적은 있을테니.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게 고전문학, 그 중에서도 고전시가일텐데 대표격으로 유명해서 가장 악명(?)높은 작품이 아마 이 <사미인곡>일거다. 근데 이게 영화 <화양연화>랑 뭔 상관이야? 할텐데, 분명히 상관이 있다.
우리는 보통 <사미인곡>을 "임금에 대한 충절을 아름다운 님에 대한 연심(戀心)으로 빗대어 표현"한 작품으로 배운다. 그걸 좀 어려운 말로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라 하기도 한다. 이와 동일한 테마의 반복을 고려시대 정과정부터 윤선도의 견회요에 이르는 계보로 설명하기도 하고.
이런 모티브의 진짜 원형은 따로 있는데, 멀리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굴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思美人兮 아름다운 님을 그리워하며
擥涕而佇貽 눈물을 훔치고서 홀로서서 멀리바라보네
媒絶路阻兮 중매도 끊어지고 길도 막히고
言不可結而詒 할말도 전할 수가 없도다
- 굴원(屈原), <사미인(思美人)> 중 -
이 노래는 충언을 계속하다가 모함을 받아 추방당한 굴원이 당시 초나라 왕을 그리워하며 지은 작품이다. 제목 '사미인(思美人)'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은 여기서 따와서 지은거다. 영화용어로 따지면 오마쥬한거다.
이런 굴원이 지은 '사미인'은 <초사(楚辭)>라고 동아시아에서 시문학의 고전으로 읽히던 책에 전해왔다. 그러니까 정철도 당연히 <초사>를 읽어봤을거고 그렇게 굴원의 시에서 모티브를 따와 사미인곡을 지었을터.
여기서 왕이라고 하는건 시를 읊던 당시의 초나라의 경양왕 웅횡이나 조선 선조 이연이라는, 특정 인물로서의 개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웅횡이나 이연이라는 개인을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하악하악! 그러니까 날 버리지 말고 중앙에서 벼슬주고 좀 써주세요, 제발~ 이런 얘기가 아닐거라는 거다. 신하의 충심이 향하는 왕이란 한 나라의 임금이라는 추상적 대상, 공적차원에서의 인격에 가깝다.
대통령에 빗대서 이해를 해보자면 특성과 개성을 가진 한 개인으로 대통령직을 맡고 있는 사적인 개별 개체로서의 아무아무개가 있는 반면, 공적 권위와 지위를 표상하기에 그 직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하는 추상적인 공적 인물로서의 대통령이라는 인격체는 구별된다는 거다.
그래서 여기서 왕에 대한 충심은 사적 개인이 아닌 공적 인물로서의 왕에 대한 것이고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조국에 대한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미인>은, 또 이걸 오마쥬(?)한 <사미인곡>은 나라에 대한 마음을 아름다운 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그려낸 노래일 것이다.
홍콩은 미인에 대한 연심에 빗댈만할 아름다운 곳이었다.
낮에는 탁트인 푸른빛에 다른 곳에선 보기힘든 다종다양한 빌딩과 시가,
침사추이 뒷 거리의 어지러운듯하면서도 어우러져있는 간판으로 뒤덮인 모습과
겨울에도 따스한 란터우섬과 리펄스베이의 영롱한 바다가 그러했다.
홍콩은 아름다웠다.
시리즈의 앞선 글들에서 이야기했듯이 <화양연화>가 반환 이전 홍콩을 그리는 영화라면 그건 또 얼마든지 나라를 그리는 마음을 연심에 빗댄 '사미인' 모티브와도 겹친다. 연인과 사랑하던 마음과 옛 홍콩에 대한 그리움의 마음이 겹쳐있는. 더구나 홍콩도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니까. 그걸 대놓고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이별연습을 하며 모운(양조위)은 리첸(장만옥)에게 다시는 보러 오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그말처럼 그 둘은 다시는 함께 하지 못한다. 이 직후의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가 영화 제목인 '화양연화(花樣年華)'의 모태가 된, 저우쉬안(周璇)의 <화양적연화(花樣的年華)>다.
驀地裏這孤島籠罩著慘霧愁雲, 慘霧愁雲
啊, 可愛的祖國 幾時我能夠投進你的懷抱
갑자기 이 외딴 섬이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였네
아, 사랑스러운 조국... 언제 너의 품에 안길 수 있을까
-저우쉬안(周璇)의 <화양적연화(花樣的年華)> 중-
노래 중 정확히 이 구절이 이별연습을 하고 난 직후인 위 장면에서 흘러나온다.
이 곡은 원래 1945년 중일전쟁 종전으로 일본 침략으로부터 벗어난 중국인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노래였다.
화양연화가 반환 전 홍콩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는 영화라면, 화양연화 개봉당시 스크린에서 들었을 <화양적연화>의 이 가사도 곡이 나오던 1946년 당시의 애국심으로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반환을 직후로 알 수 없는 미래라는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인 홍콩섬과 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내가 살던 사랑스러운 조국, 홍콩에 대한 연심이 드러나지 않는가. 마치 정철이, 굴원이 임금에 대하여 노래하듯이.
(계속...)
참고문헌
굴원 외, 권용호 역, <초사>, 글항아리
신현준, ‘花樣的年華’에서 ‘一無所有’까지, 대륙의 노래 100년, 신동아, 2007 (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66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