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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훈 May 20. 2019

지극히 주관적인 여행기

장기여행으로 얻고 있는 5가지

 

 6개월이라는 내 기준엔 너무나도 긴 여행을 떠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각 나라를 구경하며 가고 싶은 곳도 가보고 삶의 여유를 가진다는 것 외엔 딱히 얻을 게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대를 하지 않아야 얻는 게 더 큰 법일까.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내 기준엔 너무도 귀중한 것들을 얻고 있어서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내 기준에 대해 첨언하자면, 사소한 것일 수 있지만 돈 주고도 얻지 못하는 또는 직접 경험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을 중시한다.






 비행기가 덜컹거리며 빠른 속도로 달리더니 이내 날아올랐다. 적정 고도에 올라 안정을 취할 때까지 기체는 제법 흔들린다. 이미 열 번도 더 탄 비행기지만 매번 최악의 상상을 하게 만든다. 무의식적으로 창 밖을 본다. 혹시나 문제가 있진 않은지 날개 부분을 확인하고 그다음엔 아래를 내려다본다. 이대로 추락하면 육지 일지 바다 일지를 살피고 그나마 바다면 살 확률도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 저체온증으로 죽기 전에 구조대가 빨리 나를 구해주길 빌어본다.

 비행 중에 난기류를 만나면 정도는 더 심해진다. 불안감은 배가 되고 아까와 같은 이론적인 상상 따윈 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오히려 초연해진다. 나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을 그녀의 손을 잡고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키고, 평소엔 하지 못하는 낯부끄러운 말도 한다. 혼자였으면 많이 두려웠을 것 같아 위안이 되면서도 그녀는 살기를 빈다.

 곧 혼자 별 상상을 다한다며 조소를 머금는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운송수단이 비행기라며 애써 화제를 돌린다. 그러다 잠이 들곤 한다.

 기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승객들은 좌석을 정리한다. 이륙 때와 마찬가지로 기체가 흔들린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이제 다 왔는데...
 비행기의 바퀴가 활주로에 맞닿고 무사히 착륙에 성공한다. 승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친다. 남미에 와서 처음 보는 광경이다. 삶에 감사할 줄 알고, 표현하는데 숨김이 없는 그들에 힘입어 나도 조용히 박수를 치며 동조한다.

 살아있으면 된 거다. 그 순간엔 어떤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그저 삶에 감사한다.


멕시코시티를 떠나는 비행기 안





 삶 자체에 감사하게 되는 얻음을 ‘원초적인 얻음’이라고 한다면,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고 현재에 감사하거나 반성하게 되는 ‘자전적인 얻음’도 있다.

 내가 여행한 곳의 사람들은 대한민국보다 훨씬 소득이 낮거나 낙후된 나라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장삿속에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일반적인 그들의 이미지는 여유로움과 흥겨움이다.

 오히려 한국인들은 너무 웃음이 없다는 말을 왕왕 듣는다. 표현이 서툴 뿐이라고 속으로 항변해 보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얼굴을 붉힌다.

 대부분의 가게가 브레이크 타임이 확실하고, 저녁 8시면 문을 닫는다. 한국인에겐 답답할 정도로 그들에게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다. 이방인을 신기해하고 낯설어하면서도 친절하다. 먼저 다가와 도움이 필요한지 묻고, 사진을 찍자고 요청할 때는 세상 순박해 보여 기분을 좋게 만든다.


 굳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광장과 공원의 수가 많고 발달되어 있다. 특히 인상적인 건, 공원이나 각종 관광지 등에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정말 잘 되어 있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출산율에 많은 영향을 미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반면, 많이 언급하는 것들이지만 교통, 통신, 치안, 서비스 등 편의성에 관해서는 대한민국을 따라올 나라가 많지 않은 것 같다. 비례하여 물가가 비싸다곤 하지만 소득 수준도 한참 앞서 있고, 도덕성이나 시민의식과 같은 것들도 분명 한국이 좋았다. 한국은 정말 깨끗한 나라다.

 중, 남미 어느 나라를 가도 삼성과 엘지를 볼 수 있고, 기아와 현대 자동차가 돌아다닌다. 심지어 쿠바에도 있다.

 특히, 나는 대한민국의 ‘여권 파워’를 실감했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비자가 필요하지 않았고 가끔 북한이냐고 장난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Corea라고 하면 무엇이든 ‘하이패스’ 되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의 노력과 더불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는 국민성과 ‘테러 청정지대’ 임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BTS에겐 정말 감사를 표하고 싶다. 덕분에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환대를 받거나 동경을 받았다. 잠시나마 연예인의 삶을 살아볼 수 있었다.


쿠바에서 만난 KIA





 나도 대한민국의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 인력 중 하나이다. 그 교육 중엔 세계지리와 세계사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관심이 적은 탓인지 멍청한 탓인지, 누군가에겐 당연한 상식일 법한 것들도 모르는 게 많았다.


 예를 들어, 제법 잘 알려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륙에 속해 있는지, 인도와 인도네시아가 전혀 관계없는 나라라든지, 멕시코나 쿠바가 스페인어를 사용한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다루었던 각 나라의 수도 맞히기 등도 잘하지 못했다. 분명 들었지만, 매번 까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백문이 불여일견’


 역시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 여행을 위해 스스로 그 나라에 대해 알아보고, 이동 경로를 계획하고, 직접 가보기까지 하니 자연스레 익혀진다. 오래된 성당이나 유적지를 방문하기 위해 사전 조사를 하거나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보니 흥미가 더해지고 저절로 공부가 된다.

 이제 중, 남미의 지리적인 위치와 기본적인 혹은 심층적인 역사 관계까지 설명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이제 그녀에게 무식을 기반으로 한 경멸의 시선을 받을 일이 적어졌다.


에스파뇰이 남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할 당시 무기의 격차





 위에서 말한 각 나라의 지리 및 역사 관계 습득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는데, 저절로 생활 언어가 습득된다.

 정확히 기억하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영어 알파벳과 독음을 배우는 걸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심지어 직업상 남들보다 심도 있게 약 25년째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대학도 영문과를 갔을 만큼 영어와 친숙한 편이었고, 학교에서 시킨 대로 열심히 단어를 외우고 독해했다. 직업적인 전문성을 위해 문법 공부도 열심히 해서, 지금은 고등 문법도 교재 없이 설명이 가능하다.

 But... 나는 작년에 짧게 미국을 여행했는데, 25년이 무색하게도 두세 번 되묻지 않고는 알아듣지 못하거나 알아들은 척하며 넘겨야 했다. 그 후로는 대화할 때마다 긴장을 하니 passport를 알아듣지 못하기도 했다.


 듣지도 못하는데 말하지 못하는 건 말해 무엇하랴.

 그런데 이제 겨우 여행 3개월 차인 내가 어느 정도 스페인어를 알아듣는다. 옆에 있던 그녀가 놀란 것만 5번은 된다. 어떻게든 나의 말을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번역기와 손짓, 몸짓 등 모든 걸 동원한다. 그러다 보면 들은 적 있는 단어가 들리거나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다. 다시 번역기를 이용하거나 되물으며 그 단어를 익힌다. 그리고 다음엔 내가 그 단어를 먼저 사용한다.

 감히 말하건대, 이 메커니즘을 거치면 언어는 끝인 것 같다. 떠올리지 않아도 입에서 나온다.

 앞으로 약 20일 후인 스페인 여행을 끝으로 스페인어를 쓰는 국가가 없어 아쉽지만, 대신 남은 기간엔 영어 회화 실력이 늘 거라는 걸 확신한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스페인어를 공부할 거라고 공언한다. 또 하나의 무기가 될 것이다.


외국인의 질문에 답하는 중이다. 유창하진 않지만, 적어도 두렵진 않다.





 우선,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 관찰을 하고 판단을 한다. 사람을 잰다는 식으로 나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동물도 서로를 경계한 후 시간을 두고 교감을 하듯,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라고 느끼는 것은 편견과 선입견인데, 그 견해의 기준이 사람 자체가 아니라 배경이 되는 경우가 많다. 직업, 학벌, 재산 등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여행하다 만난 사람들끼리는 그런 걸 알 수 없을 뿐더러 굳이 묻지 않는다. 외모, 말투, 행동 등 사람 자체만 보고 판단하게 된다.

 그들과 대화하고 어울리며 나를 드러내고 서로를 알아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와 잘 맞거나 반대로 맞지 않는 사람을 분별해 내는 안목이 길러진다. 그리고 나 또한 상대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배려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한마디로 눈치가 는다.


 다음으로, 여행자끼리는 좀처럼 화내는 법이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타지에 와 있고 대부분 행복하기 위해 떠나왔다. 짜증이나 화를 내는 상황은 그들의 여행을 타당하지 못하게 한다. 시간이 넉넉한 장기여행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우리 모두는 이방인의 입장이다. 조금은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하고 미소 짓는 게 나 자신과 내 나라의 이미지를 개선할거라고 느낀다. 그리고 막상 양보를 하면 손해를 보거나 졌다는 느낌보다는 선한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 그렇게 이타심을 배운다.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 자존감이 높아지면 자신감이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면 인생 전반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나의 시선이 달라지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계속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이러한 변화는 분명 나 자신뿐만 아니라 적게는 내 주변에, 많게는 사회 전반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도 이건 자신감이 과했다(남미 스타일에 도전했다가 위원장 동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장기여행을 하면서 들게 된 생각인지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인지 알 수 없는 데다가, 장점인지 단점인지 알 수 없어 더욱 혼란스러운 의문이 있어 그 의문을 던지며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나는 백수가 되었지만, 만성피로로 달고 살던 눈가의 경직이 사라졌고 얼굴이 좋아졌다. 돈은 못 벌지만, 자고 싶으면 잘 수 있고 매일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다.

 

 꼭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사람은 꼭 열심히 살아야 하나요...?”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지 잘생겼다고는 안 했다







*세계여행 사진들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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