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서시>
내러티브는 설득력이 높다고 믿는다.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다른 어떤 영역보다 ‘문학사’를 가르칠 때 가장 즐겁다. 누군가 전공을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역사’라고 답한다. 내게 事든 史든, 스토리와 맥락을 품은 서사의 총체는 늘 강한 설득력을 지녀왔다.
아마도 그 이유는 ‘원인과 결과’의 반복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든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행위에는 반드시 그에 앞선 원인이 있고, 그에 대한 반응은 다시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된다. 삶은 그렇게 이어져 왔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랫동안 인과율을 신뢰해 왔다. 잘한 일은 언젠가 돌아오고, 잘못된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믿음. 누군가에게 건넨 친절은 어떤 방식으로든 되돌아온다고 생각했다. 삶이 그렇게 작동한다고 믿고 있으면, 적어도 지금의 선택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위안은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이 단순한 구조가 자주 어긋난다는 느낌을 받는다. 원인은 분명 있었는데, 결과가 오지 않는 날들이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하루가 접히고, 그다음 날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그렇다고 그 원인이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만 또 하나의 결과처럼 남는다.
생각해 보면 삶에서의 인과율은 문학보다 훨씬 느리게 작동한다. 소설 속 인물은 몇 장만 넘기면 선택의 대가를 마주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장면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어떤 선택은 너무 이르게 의미를 부여받고, 어떤 선택은 끝내 아무 설명도 받지 못한 채 남는다. 공들인 마음이 닿지 않는 경우도 그중 하나다.
마음을 쏟았던 학생이 있었다.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고, 가정사도 복잡하다고 했다. 그래도 내 학생이니 학교 안에서는 최대한 바르게 지켜주고 싶었다. 요구하는 건 가능한 선에서 들어주었고, 조언이나 지지가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편을 들었다. 그게 내 역할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민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매뉴얼대로 처리한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다. 보호자는 내게 “내 딸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라고 말했다. 그 순간, 공들여 쌓아 왔다고 믿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원인이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분명한 건, 내가 의식적으로 남겨왔다고 믿었던 원인들이 그 결과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은 인과율을 조금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모든 원인이 곧바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쪽으로. 그리고 원인과 결과, 그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결과들,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선택들, 혹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 이야기들로.
윤동주의 〈서시〉를 떠올린다. 그는 결과를 약속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하루를 선택하는 태도에 대해 말한다. 무조건적인 인과율을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선택을 유예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 시는 여전히 유효하다.
여전히 선택을 한다. 결과를 기대하기보다는, 원인을 남기는 쪽에 가깝게. 지금의 선택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하루로 남기고 싶지는 않아서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_윤동주
이 글은 위로를 하기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삶이 늘 인과율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멈출 수 없다는 마음을
조용히 기록해두고 싶었습니다.
한가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