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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Apr 23. 2019

소설보다 낯선

영화 <Stranger than ficiton>

 'stranger than fiction’은 소설의 개념들을 차용하여 영화를 진행시킨다. 영화와 소설은 시간의 흐름을 중요하게 여기는 ‘서사’(쓸서, 사건사) 장르이다. 사건이 펼쳐지려면 시간에 흐름에 따라 변화해야 하기 때문에, 서사에서 시간은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영화는 그것을 증명하듯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 모두 시간을 상징하는 손목시계가 등장한다. 영화 초반부의 헤롤드의 삶은 ‘시간에 의한 스토리’다. 손목시계와 시간에 맞춰 살아가는 인물의 설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화 후반부의 헤롤드의 삶은 ‘가치에 의한 스토리’다. 고장 난 손목시계와 사랑을 찾아가며 변화하는 헤롤드가 그러하다. 영화는 시간이 아닌, 가치에 의한 스토리의 승리를 표현한다. 역사적으로 소설가들은 시간의 독재에서 소설을 해방시키고 가치에 의한 이야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소설은 시간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게 된다. 이는 교통사고로 헤롤드의 손목에 평생 박히게 된 손목시계의 파편으로 형상화된다. 파괴된 시간성 그러나 그 시간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소설의 한계를 보여준다.


 영화는 헤롤드의 <죽음과 세금>의 ‘속 이야기’와 서술자 에펠의 <죽음과 세금>의 ‘겉 이야기’라는 두 겹의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헤롤드는 자신의 일상을 완벽하게 계산하고 통제하며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에펠의 목소리가 들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받는다. ‘죽음과 세금’ 속에서 헤롤드의 죽음은 예정되어있었다. 하지만, 헤롤드와 에펠이 만나는 장면을 기점으로 이야기의 경계는 무너지고, 소설의 결말은 뒤바뀐다. 해피엔딩에 대한 해석을 선한 행동이 가져온 결과라는 교훈으로 마무리 짓기에는 부족하다. 왜 헤롤드는 죽지 않아도 될까? ‘죽음과 세금’ 속 헤롤드의 죽음에 대해 영문학 교수는 반드시 너는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You have to die) 그래야 소설이 완전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플롯의 개념이 등장한다. 플롯은 인과관계를 강조하는 사건의 서술이다. 플롯은 인물에게 인과관계에 따라 지시를 내린다. 완전한 플롯은 이러한 인물들을 사슬로 묶어 놓고, 완결성을 획득한다. 따라서 플롯은 소설에서 언제나 인물과 전쟁을 벌인다. 주네트에 의하면, ‘정도 이상으로 정교함을 추구할수록 개연성은 약해진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통제하던 헤롤드가 한 번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도, 완전하게 짜인 소설의 결말을 엎고 인물의 살려낸 점도 모두 ‘정도 이상의 정교함을 추구하는’ 플롯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인물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개념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다. 영화에서 에펠은 건물 옥상에서 마치 인형극을 하듯 손을 움직인다. 장면 속 그녀의 모습은 마치 신과 같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은 작가가 등장인물의 행동과 태도는 물론 그의 내면세계까지도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전지적이라는 말은 신이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총괄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과 비견된다. 그러나 소설에 있어 전지적 시점은 신과 같은 것은 아니고, 소설이 전개되는 과정에 참가한다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신은 어느 때나, 어느 곳에나 동시적으로 존재하지만, 소설 속에서 행사하는 화자의 전지적 능력은 소설이 전개되는 순서와 테두리에 한정되고 있다. 화자의 전지적 능력은 이야기의 주제와 작가가 의도하는 수준에서만 부여되는 것이다. 실제 작가 에펠은 자신의 모든 소설의 결말을 비극으로 끝내 왔다. 그러나, 죽을 것 앎에도 죽음을 택하는 인물(피화자)인 헤롤드 크릭을 보고 소설의 전개를 바꾼다. 따라서, voice로 지칭되는 서술자의 서술 역시 변화하게 된다.


 인과성은 당위 규범으로써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 작가와 독자 사이의 해석 지평이 빚어내는 것이다. 서사 전개의 중요하게 기능해야 하는 흥부전의 제비가 현시점의 독자들의 세계에서 납득하기 어렵기에 영향력과 개연성이 약해진다. 이처럼 소설의 인과성은 동시대의 논리다. 서사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작가 그리고 독자가 합의하는 영역에서 성립하는 것이 인과성의 논리이다. 작가 에펠은 바뀐 결말에 대해 영문학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은 자기가 죽을 거라는 걸 모르는 남자가 죽는다는 내용이에요. 하지만 자신이 죽을 거라는 걸 안다면, 그걸 막을 수 있으면서도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런 남자라면 살게 해주고 싶지 않겠어요?” 헤롤드는 입체적 성격의 인물이다. 그는 영화의 진행과 함께 행동 방식, 태도 그리고 성격도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관객들은 인간성의 다양한 변모를 확인할 수 있다. 헤롤드 크릭은 일상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개척하면서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personality)을 발휘한다.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고 관객 즉 독자에게 놀라움을 주었으니 그는 살아나야만 하는 것이다. 독자와 작가가 합의한 영역에서 헤롤드 크릭은 새롭게 생명을 부여받는다.


헤롤드는 공동체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만을 하는 도덕적인(moral) 인물이었다. 그의 모든 세계는 숫자와 시간과 계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서술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는 자신의 세계가 낯설게 느껴진다. 소설이 되어버린 그의 삶은 그를 stranger로 만든다. Stranger than fiction을 ‘소설보다 낯선’이라 번역됐지만, 실은 소설이라는 서사에 묶이지 않고, 새롭게 삶을 개척하는 헤롤드 크릭의 해피엔딩을 스포일러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그의 삶을 낯설게 만들었다. 낯설게 하기라는 문학 용어가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던 대상을 낯설게 만들면, 대상이 무섭게 느껴질 수 도 있지만, 모든 것이 새롭게 인식될 수 도 있다. 소설을 매개로 우리는 삶에서 얼마나 stranger가 될 용기가 있는지 이 영화는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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