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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Apr 27. 2023

Cannot help ~ing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영화  프로젝트 <4등>

 초등학교 때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 당시 피서를 갔다 수영을 할 줄 몰라 물에 빠져 죽은 또래 아이 뉴스가 큰 화제가 됐었다. 한국에서 사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피아노/태권도처럼 우리 동네에서는 당시 스포츠센터 생존수영을 배우는 것이 유행이었다. 또래집단을 형성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려면 방과 후 수영을 다녀야 했다. 이 흐름에 편승해 초등학생 수영만 할인을 제공했던 센터의 상술도 한몫했다. 낮은 물에서 킥판을 들고 음파음파를 할 때만 해도 전날 설렘으로 잠을 설치곤 했다. 반이 올라갈수록 수영을 전문적으로 준비하는 아이들과 섞여 수업을 듣게 됐는데 선생님들의 수업방식도 점차 스파르타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수업시작과 동시에 ‘뺑뺑이’라는 것을 시켰는데 1번부터 8번 레인까지 왕복으로 중간에 멈추지 않고 한 명이 출발하면 연쇄적으로 출발해 이동하는 것을 준비운동으로 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본 수업이 아니니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호흡이 딸려도 멈추면 안 된다. 앞에서 멈추면 뒤에 따라오던 친구들이 줄줄이 멈춰 선다. 뒤쪽에 멈춘 행렬은 목을 내빼며 자신의 수업이 누구 때문에 지체되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전체행렬이 지체되면 선생은 가장 늦게 출발한 아이들을 혼냈다. 수십 명 아이들의 비난의 눈초리를 받기 싫다면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고 꾸역꾸역 끝까지 가면 된다. 이 뺑뺑이를 할 때 선생은 물속에 들어오지도 아이들을 잘 지켜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서로가 서로의 판옵티콘이 되어주니까.


 초급반부터 나와 같이 수영을 시작했던 같은 학교 여자 아이가 하나 있었다. 같은 반에서 시작해 비슷하게 월반을 하다 보니 학교에서 오며 가며 인사를 하고 샤워를 할 때 말을 섞던 정도의 친분이었다. 그 친구는 체력이 좋지 않아 수영을 시작했다고 했는데 얼른 윗반으로 올라가 오리발을 끼고 싶다고 서로 호들갑을 떨곤 했다. 뺑뺑이를 시키는 반에 올라오고 나서부터 친구의 낯빛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뺑뺑이 때마다 늘 멈춰서 숨을 헐떡였고 그 친구는 전체 행렬에 방해가 되는 존재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입술이 보랏빛이어도 행렬이 중단되면 아이들은 그 친구를 노려봤다. 선생이 단체로 혼을 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친구는 월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영을 그만뒀다. 수영을 그만둔 후에는 학교에서 마주쳐도 서로 인사하지 않았다.  


 뺑뺑이의 헐떡거림을 겨우 견디고 올라간 반에서 나는 평형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계속 물에 가라앉았다. 수업이 50분 진행되면 항상 10분 정도 아이들이 물속에서 자유롭게 노는 시간을 줬다. 그 시간 동안은 여러 레인을 가로지르며 영법에 관계없이 수영장 전체를 헤집고 다닐 수 있었다. 사실 아이들은 모두 그 10분을 위해 수영 배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두가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나는 늘 그 시간마다 따로 밖에 나와 평형 자세를 혼자서 벽을 보고 몇 달 동안 연습해야 했다. 샤워실에서 아이들은 위로의 말을 건넸고 수영선생은 엄마와의 상담에서 내가 근성이 있다며 칭찬했다고 들었지만 결국 나 역시 마지막까지 오리발을 배우지 못하고 수영을 그만뒀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박탈당했던 것은 10분의 시간이 아니라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칠 자유와 이를 통해 수영의 즐거움을 지속시킬 원동력이었다. 나를 포함해 거기 있는 모든 아이들이 뺑뺑이를 견디고 계속 수영을 배울 수, 아니 견딜 수 있었던 건 그 10분의 시간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인생이 그렇다. 그 별거 아닌 10분의 행복을 무시하면 그 어떤 것도 지속시킬 수 없고 포기하게 된다. 그게 설령 목숨이어도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가 1등을 하기 위해 놓치고 간과하는 그 10분과 같은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상기시킨다.


 영화는 엘리트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답게 박세리와 박찬호로 시작된다.


“저런 딸 두면 얼마나 좋아? 내일 박찬호는 몇 시에 하는 거야?”
 
“니 하나 잘 되게 해 주려고. 니 메달 따게 해 주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개고생 하는 줄 알아? 니는 국가대표 자격이 없어. 나중에 내한테 감사할 날이 꼭 올기야.”


 이 대사들은 한국의 스포츠 산업의 생산과 소비방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단 한 명의 엘리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1등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형성된다. 체육/스포츠계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문화/경제 모든 부문에서 한국은 이렇게 성장해 왔다. 삼성, 봉준호, 손흥민, 김연아, BTS, 블랙핑크가 나오기 전까지 그 이전부터 한국은 불모지의 환경에서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여 세계적인 성과를 일궈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는 서구 선진국에도 한국의 태릉선수촌 같은 시설이 있고 큰 대회를 앞두고 집중 훈련을 하지만 우리처럼 성장기 선수들을 가족, 학교, 또래집단에서 완전히 분리한 채 운동만 하게 하는 선수촌 시스템을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영화 속 준호는 코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4등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불행하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엄마에게 시합 전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고 순위 발표 이후 락커룸에서도 아이들과 웃고 떠드는 장면들이 계속 등장한다. 하지만 준호가 수영을 광수에게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는 급격하게 웃음을 잃기 시작한다. 학교 쉬는 시간에 웃고 떠드는 아이들 사이로 준호는 늘 엎드려 잠을 자고 더 이상 웃지 않는다.


광수는 준호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내내 매질을 하며 노력해야 한다고, 절실해야 1등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쌤이 네가 미워서 때린 게 아니거든. 네가 집중 안 하고 시키는 대로 안 해서 답답해서 안 그러나.”
“하기 싫지? 도망가고 싶고. 그때 잡아주고 때려주는 선생이 진짜다. 내가 겪어보니 그렇더라.”  
“네가 죽을힘을 다해서 운동하면 내가 뭐라 하겠나? 네가 열심히 하니까 쌤이 몽둥이를 드는 거지”

 

체벌 이후에는 분식집에 데려가 떡볶이를 사주고, 마사지도 해준다. 준호는 더 혼란스럽다.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면서 끊임없이 이 모든 체벌과 분노가 다 개인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내재화시킨다. 이를 완벽히 순응한 준호는 체벌여부를 아빠(영훈)에게 들키자 오히려 코치 광수를 두둔하며 자신이 열심히 하지 않은 탓이라고 말한다.


“너 바보야? 지금 먹을 게 입으로 들어가니? 야, 4등. 나 너 때문에 죽겠다. 너 뭐가 되려고 그래? 너 꾸리꾸리하게 살 거야 인생을? 준호야, 너 엄마 싫지? 네가 진짜 싫어하는 엄마가 뒤에서 막 쫓아간다 이렇게 생각하고 수영하란 말이야.”
 
“엄마는 뭘 빌었어?”
“준호형 메달 따게 해 달라고.”
“나는?”
“어?... 우리 기호는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가게 해달라고? 그리고 아빠는 건강?”
“엄마는?”
“엄마는... 없어.”
 
“네가 무슨 권리로 수영을 그만둬? 엄마가 너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네가 무슨 권리로 수영을 그만둬. 이 나쁜 놈의 새끼야. ”
“기호야 너는 뭐?”
“엄마의 희망”

 

영화가 끝날 때까지 준호의 엄마의 이름이 ‘정애’인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영화 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이 작품 속에서 오직 ‘준호엄마’로 기능한다. 작품 속 그녀의 욕망은 완벽하게 배제돼 있다. 자식이 꿈을 포기하면 이는 엄마의 자아붕괴로 이어진다. 엄마의 붕괴는 곧 가정의 붕괴다. 나의 포기로 가정이 붕괴되는 것을 연쇄작용처럼 상상하면 그리고 자신은 또래집단과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평생 운동만 해왔다면, 엘리트 스포츠를 포기하려는 청소년에게 1등 말고는 죽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이것은 비단 스포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청소년은 모두 이런 식의 유년기를 보낸다. 우리는 한 번도 행복한 4등의 삶을 배워본 적이 없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박찬호는 최근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노력은 누구나 다 하는 거예요. 실패가 두렵지 않아야 해요. 특히 젊은 사람들은 실패가 너무 두려운 거야. 누군가의 인정만 받고 싶어 하는. 우리도 젊었을 때 그랬지만. 실패하는 순간 자기가 더 많이 뛰어 올라와 있다는 걸 못 느끼는 것 같아. 박찬호 124승 이전에 123승의 노모 선수가 있었다. 한순간에 없어지는 건 내가 아니다. 부와 명예와 같이 한 순간에 없어지는 건 내가 아니다. 나는 매일 반복하는 것. 공 던지는 게 나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곧 나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박찬호의 말에 따르면 광수는 열심히 하지 않아서 혹은 중요한 순간 맞아도 견뎌내지 못해서 그런 인생을 살게 된 게 아니다. 광수는 도박을 해서 아시안게임에 나가지 못했다. 도박은 방탕과 방종의 상징보다는 일확천금의 상징에 가깝다. 한 순간에 얻고 사라지는 것. 흑백 시퀀스에서 우리는 광수가 어떤 삶을 매일 반복했는지 확인했다. 연습 전날에도 기자 영훈과 과음 후 새벽훈련에 들어갔다. 그는 매일 하는 행동처럼 자신의 천재성을 믿고 고향 형들과의 도박판에 마지막까지 앉아있었다. 그렇다면 광수는 그렇게 살아 마땅한가? 개인이 매일 올바른 방향성으로 노력하면 모두 해결될 문제인가? 우리 사회는 준호의 아버지(기자 영훈)가 그랬듯 시스템의 폭력을 묵인하고 방관하여 개인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다시 박찬호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왜 청년들은 실패가 두려울 수밖에 없나. 얼마 전 강남의 한 자택에서 아이돌 산업에 종사하는 한 젊은 청년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것은 이 산업군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그가 죽은 후 뉴스에는 무주택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전세사기가 연일 보도됐다. 그리고 그 피해 청년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있었다. 강남에 집이 있어도 죽고 전셋집이 없어도 죽는다. 집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한국의 집 안에서는 청년/청소년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사회와 가정은 물러설 곳 없는 이들에게 한 가지 질문만 반복한다. 


“what do you want to be in the future?”
: 너 커서 뭐가 될래?


평생 1등만 할 수 있는 인생이 몇이나 되겠는가. 1등의 영광에 취해 사회는 99%의 삶을 돌보지 않는다. 엄마가 주입한 남들이 들으면 입이 떡 벌어질 꿈 하나쯤은 가슴속에 품고 있어야 대한민국 초등학생이다. 그 아이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좌절하는 청소년기를 지나 내 가슴속의 작은 꿈 하나조차 없는 어른이 되고, 그 어른 둘이 만나 자식이라는 유일한 희망만을 보고 살아간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만 그중 아무도 행복한 이는 없다. 우리 사회는 아무도 이해가지 않아도 모두가 행복한 것은 불가능한 걸까.


“뭐 때문에 하고 싶었노, 수영이 처음에?”
 “놀려고요”


 나는 요즘 발레를 배운다. 어릴 때 배우고 싶었지만 아무도 시켜주지 않아 커서 내가 직접 나에게 시켜줬다. 취미면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재밌게 배우면 된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나는 발레를 잘하고 싶다. 수영처럼 흥미를 잃지 않고 오래오래 배우다가 마침내 잘하고 싶다. 발레도 수영도 인생도 소년성공만이 답이 아니다. 성취는 허무하게 찾아오고 목표를 달성한 후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우리는 과정의 빛을 향해 유영하며 인생이란 바다를 헤엄쳐야 한다. 푸쉬킨의 시처럼 우리의 마음이 늘 미래에 있기에 현재가 슬픈 것이다. 우리는 지금 현재 헤엄치는 이 순간에 행복해야 한다. 내가 지금 아무도 시키지 않는 발레를 배우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영화 속 두 형제가 엄마의 비난에도 컴퓨터를 붙잡고 게임을 하는 것도 모두 재미있어서다. 상장을 줘서가 아니다.


게임하는 형제들과 엄마가 붙여놓은 상장들


 수영장에서 봤던 빛이 침대 머리맡에서 맴돌던 준호는 수영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다시 수영을 시작한다. 그에게 코치(광수)는 자신이 신기록을 세울 때 꼈던 수경을 선물로 주지만 준호는 자신의 수경을 챙긴다. 오로지 자신의 관점과 자신의 영법 그리고 자신의 선택만을 밀고 나간 준호는 마침내 1등을 한다. 동경하던 형에게 던졌던 질문과 같은 질문을 받은 준호.




“형, 1등 하면 어떤 기분이에요?”
“지금은 진짜 1등 하고 싶어요. 그래야지 수영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요.”


 YG에서 차세대 블랙핑크를 육성하는 프로그램에서 후배 베이비몬스터에게 제니는 ‘우리는 네 명 모두가 이거 아니면 죽을 거야. 이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라고 조언해 주었다. SM에서는 입학조건이 학교자퇴인 연습생 학원을 만들었다. 연습생들은 연예인으로 데뷔하지 못하면 그 모든 시간과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 이건 인어공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매해 수백, 수천 명의 아이들에게 벌어지는 현실이다. 한국 사회는 청년들에게 이런 식으로 꿈을 달성하라고 말한다. 모든 걸 포기하고 이것만 보고 달려가라고. 이거 아니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덤비라고. 그리고 안 되면? 자아와 가정이 붕괴되어 모든 상황이 견딜 수 없으면? 그 이후는 개인의 책임이다. 무책임한 사회와 어른들의 학대 속에 노력이라는 최면을 걸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과연 정상일까?


 우리는 이제 10분의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고 그 어른들이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 자유롭게 헤엄치는 즐거움을 아는 아이는 목표를 정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더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면 자연히 엘리트 스포츠가 아니라 생활체육이 1등 빌보드 가수가 아니라 인디밴드의 삶의 질이 보장되는 나라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기 위해 세상에 오지 않았다. 손흥민도 봉준호도 BTS도 다 각자의 인생에서 행복하기 위해 매일을 반복하다가 탁월해졌을 뿐.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반복하면 된다.


“당신이 반복적으로 하는 일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그러므로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중요한 건 매일 10분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며 꺾이지 않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각자의 인생에서 1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출처>

1. https://weekly.donga.com/3/all/11/97157/1

2.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52350#home

3. https://www.youtube.com/watch?v=NaQtbLr3kcI

4. https://www.youtube.com/shorts/0rAP0DHw5Ow

5. https://www.youtube.com/watch?v=kGH1jpVcrPg&t=1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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