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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Feb 14. 2019

너는 만년필

『아직은 따뜻한 우리』, 북플라자, 2017

너는 만년필.


너는 나에게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 네가 없던 과거에도 나는 전혀 불편함 없이 살고 있었어. 관심이 없었으니, 너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네가 내 삶에 의미 있게 다가올 줄 몰랐다.


너를 처음 만났던 날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어. 차가 무척이나 막혔지. 너를 사러 가는 길인 줄 모르고, 함께 따라나선 그 길에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차창 밖만 내다봤어. 더운 공기가 만들어내는 아스팔트의 아지랑이, 빽빽하게 정체된 차량들이 내보내는 소란스러운 도시의 소음들. 늘 피곤하도록 똑같던 일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만남.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너의 첫인상은 별로였어. 너는 촌스럽고 고리타분했으니까. 손도 너무 많이 가. 왜 역사 속 많은 사람들은 너를 잡고 있었던 걸까? 이해할 수 없었어. 그래서 너와 잘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여느 필기구처럼 그냥 좀 쓰다 말겠지. 그리고 내 방 책상 위 어딘가에 던져져 먼지가 쌓인 채로 내 기억 속에서 잊히겠지. 나는 너 같은 펜은 본 적이 없으니. 너는 지금껏 내가 살아온 삶과는 너무 달랐으니까.


너는 여유를 갖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사용해야만 했어. 나는 여유도 시간도 없었으니, 그런 네가 불편했고. 그래도 기왕 만났으니, 한번 써보지 뭐. 그렇게 가볍게 시작했어.


처음 너와 적은 문장은 라캉의 것. 적히던 그 문장은 아주 더디게 종이 위에 스며들었지. 쉽게 번질 수 있으니, 기다려야 했다. 인내심이 필요했어. 내가 왜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거지.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 그것들을 찬찬히 읽어봤지. 그때 알았어. 아 이게 너구나. 처음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존재.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너를 드는 순간은 소중하게 남기고 싶은 글일 때. 진심을 담고 싶을 때. 우린 말과 글 없이도 밤새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 너는 기억하지? 내가 너를 잡고 건네던 그 생각들을. 수많은 밤을 아무 말 없이 너를 잡고 한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나는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을. 너는 계속해서 나를 생각하게 만들었고, 나는 네게 걸맞은 글을 적으려고 했던 그 시간들. 너와 나는 알고 있지. 아무 말 없이 조용했지만, 우린 아주 깊은 대화를 나누었어.


불편하게 적어 내려가는 한 글자 한 글자는 볼펜의 그것과는 달랐어. 숨 가쁘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보다는 조용한 카페에서 혹은 늦은 밤 책상에 홀로 앉아 너를 사용하게 됐어. 효율이라는 단어와 너는 거리가 머니까. 어쩌면 그래서 더 마음이 갔나 보다. 나도 사실은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너는 내가 잊고 지내던 것들을 상기시켜주었지. 빠르게 적히고, 쉽게 망각되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너와 느리게 함께한 글들은 조금 더 가슴속에 오래 남는 것 같았어. 너는 낭만적이구나.


 너는 萬년필. 너의 만은 일만 만. 그냥 연필과 다르게 일 만 시간은 들여야 너를 들 수 있다는 뜻일까. 너의 이름이 무겁게 다가왔다. 너를 쥐고는 아무것도 적지 못했던 날들도 많았지. 너의 존재가 나를 괴롭히던 날들. 아무 글이나 적어대던 펜들과 너는 다르니까. 너를 만나고 어느 순간부터 쉽게 글을 적을 수 없게 되었어. 너와 적은 글에는 그 이름만큼의 무게가 담겨야 할 것 같았어.


글은 쉽게 쓰이지 않는다는 것. 쉽게 쓰인다면, 그 가치도 얕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 글은 진실될 때, 가장 빛난다는 것을 알려줬지. 아름다운 것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느껴졌지만, 그것을 만들어내기까지는 무척 고통스럽구나. 너는 하나씩 차근차근 나에게 보여주었지. 모든 문장들은 거기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어. 그리고 그 문장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기까지 아주 긴 인내의 시간들을 볼 수 있게 되었어. 너를 통해.


너의 끝은 아주 예리하지. 예리한 너와 닮은 글을 적고자 했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내 글은 여전히 두루뭉술해. 촌스러운 내 글이 부끄러워 너를 닮고 싶었어. 그건 나의 과욕일까? 언젠가는 너와 닮은 글을 쓰고 싶다. 그것은 너와 함께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


날 때부터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주변에 비해 너는 자신을 초라하다 여기지. 그러나 이미 너는 너로서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고 있어. 화려한 문양보다는 질리지 않는 심플한 디자인이 더 아름다워. 다른 이와 비교해 너를 낮추지 마. 너는 내 이름이 아로새겨진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니까. 이름이 적힌다는 것과 새겨진 다는 것은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 같아. 너는 내가 각인된 존재.


잉크가 다 닳아버리면, 버리고 새로 사는 다른 펜들과 다르게 너는 잉크를 채우며 오랜 시간을 함께할 존재지. 텅 빈 네 속을 채울 때마다 그런 네가 익숙하지 못해 내 손은 엉망이 된다. 그래도 너를 놓지 못하는 것은 함께하는 그 시간 동안 내 손에서 느껴지는 그 감촉이 황홀해서.


 얼마 전 비가 내렸어. 너와 적은 글들이 번질까 품에 안고 뛰었지만, 이미 그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 공들여 써내려 간 그 시간을 비웃는 듯.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너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쉽게 번질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적었지. 이 모든 것들을 안고, 너와 함께하고 있어.


나는 너를 나에게 가져다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너는 만년필.

아니, 사실은 그가 만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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