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Are We Going?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다. 글을 쓰는 것은 어떤 유의미함을 줄 수 있을까. 다만 흰 종이에 활자로 적힐 뿐인 그 흔적들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사고와 표현’ 수업에서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부터 사고한다는 것. 너무 많은 고민들을 품고 살아 고된 현대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 깊은 사유는 오로지 글을 쓰면서부터 가능하다는 말은 가혹하지만 분명하게 와 닿았다. 희망적으로 바꿔 말하면 무언가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려면 글을 쓰면 된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로 했다. 창작은 창작자의 생명력을 갉아먹어야만 실현할 수 있다 믿는 내게 이 소설은 예술과 현실의 간극을 다룬 점이 매력적이었고, 무엇보다 저자가 서머싯 몸인 이유도 컸다. 그는 오래 살았고, 계속해서 글을 썼다. 지속 가능한 예술을 삶으로 구현해낸 그도 동경했던 뮤즈가 있었고, 그것이 고갱이었다.
소설은 고갱으로 상징되는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이 평범한 증권 중개인에서 위대한 예술가로 포장되기까지를 보여준다. 포장이라 표현한 함은 소설 내에 평범함과 위대함 사이에서 엇갈리는 스트릭랜드에 대한 평가 중 그 어떤 것도 다수의 독자에게 공감을 사기 어려워서다. 그의 행동은 상식적이지 않기에 평범하다고 할 수 없고, 위대하다고 보기에 많은 인물들을 종국에 파멸시킨다. 위대함보다는 위험함에 가까운 이 인물은 설령 좋은 의도에서 비롯됐다 할지라도 자기 세계에 침범하려는 이들을 모두 쫓아버린다. 자신을 향한 그 어떤 영향력도 허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첫 번째 덕목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 많은 타인을 언제든지 망가트릴 준비가 된 이 남자의 생은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되다 사후에서야 위대해진다. 서머싯 몸은 그 포장의 역사를 꼬집는다. 그는 위대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으며 그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한 사내였을 뿐이다. ‘그저’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것, 그것이 예술가의 두 번째 덕목인 것이다.
“왜 작품을 전람회에 출품해 보시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남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 하실 줄 알았는데요.” “당신은 그렇소?”
그가 이 두 마디 말에 담았던 그 측량할 수 없는 경멸감을 나는 지금도 다 표현할 길이 없다. (... 중략...)
“전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무인도에서 글을 쓸 수 있을까 하고요. 제가 쓴 글을 저밖에는 읽을 사람이 없는 게 확실하다면 말입니다.” 스트릭랜드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두 눈이 야릇하게 빛났다. 그의 영혼이 마치 뭔가를 보고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나도 때로 생각을 해보았소.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외로운 섬, 그 섬의 아무도 모르는 골짜기에서 신비스러운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살아볼 수 없을까 하고. 거기에는 내가 바라던 것을 찾을 수가 있을 것만 같아서.”
대화에서도 예상할 수 있듯 찰스 스트릭랜드는 망망대해의 외로운 섬으로 홀연히 떠나 어떤 이의 평가도 개의치 않고 그림을 그린다. 그의 결말은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비참하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그림은 오두막과 함께 불태워버리고 자신은 나병으로 죽는다. 개성이 강한 예술가의 위대한 작품은 세기에 걸쳐 사랑받지만 그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스트릭랜드의 광기에 가까운 창작욕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작품이 인정받기까지 미치광이에 불과한 그를 품어주는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생의 무게는 함께 감당하기는 싫으나, 그 생을 거름 삼아 맺어진 예술이라는 열매는 사랑하는 것. 서머싯 몸은 자신도 겪었던 이 예술의 모순에서 오는 괴리감, 외로움에 대한 답을 앞선 이의 발자취에서 찾으려 한 듯 보인다.
그렇기에 흥미로운 점은 스트릭랜드의 전기를 서술하는 ‘나’라는 관찰자다. ‘나’는 글을 쓰고, 찰스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그린다. 찰스 스트릭랜드의 인생을 지켜보며 ‘나’역시 글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해나간다. 서머싯 모옴이 고갱의 삶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견해를 정립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옴은 자신을 매혹시킨 예술가의 생애를 추적하고 공백의 영역에 소설적 상상력 개입시켜 자신만의 예술을 완성한다. 고갱의 전기소설임에도 서머싯 몸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이유는 그는 ‘나’의 입을 빌려 자신의 뮤즈와 대화하고 살아 움직이며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에서 만큼 예술가는 작품으로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삶, 그 자체로 존재한다. 위대함의 신화로 박제된 작품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삶, 그 생동감 속에서 독자는 그의 삶을 체현한다. 예술의 본질적 속성이 생동감임을 망각한 이들을 일깨우며 말이다.
그는 지금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힘이며, 어떤 방식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인지는 불투명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서 홀로이다. 각자가 일종의 구리 탑에 갇혀 신호로써만 다른 이들과 교신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신호들이 공통된 의미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뜻은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만 하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 중략...)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는 신전을 찾아 나선 영원한 순례자 같아 보여요.”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계속 써나가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내면의 질문에 찰스 스트릭랜드는 확실한 답을 제시한다. 영원한 순례자처럼 계속 글을 쓰며 살아가라는 것. 찰스 스트릭랜드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살아생전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한 그림을 계속해 그려나가는 것은 인정해주지 않는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에게 예술을 하는 것은 단지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어떨까. 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평가와 인정에 목말라있다. 소셜 네트워크 속 오가는 ‘좋아요’ 혹은 ‘싫어요’에 익숙한 우리는 일상의 한 조각에서조차 평가를 허한다. 영원한 순례자의 삶이 고될지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평가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이다. 반기지 않는 그림과 생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것, 존재할지도 알 수 없는 신전을 향해 자꾸만 나아가려는 몸부림 그것은 곧 자기 성장과 맞닿아있을 것이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바랬던 것은 어쩌면 자신이 만족할만한 무언가를 완성하기 전까지 남들의 침범에서 자유로운 섬과 같은 환경이 아니었을까.
겨울은 춥고 고독한 계절이다. 아니 어쩌면 생은 늘 그런 겨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계절은 자신을 온전히 지켜내고 키워나가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좋다. 누구의 평가도 필요치 않는 그 시공간적 환경에서 자신만의 것을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 나를 적는다는 것은 곧 나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글이든 그림이든 자신을 표현하고 남겨두는 흔적은 불투명한 인생 속에서 자기만의 방향성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빠르게 지나가고, 쉽게 망각되는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느리게 적히는 과정 속에서 나를 좀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이 책을 그 시작점으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지.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에서 나조차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쫓는 영원한 순례자들이니. 내가 남긴 흔적들은 지나간 타임라인처럼 힘겨웠던 고통은 무뎌진 추억이 되고, 행복은 나를 북돋아줄 보석으로 남을 것이다. 힘들 때 결국 자신을 안아주는 것은 내가 살아온 모습이기에. 그렇게 쌓인 적층들은 나의 발자취의 방향을,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중임을 알려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예술처럼 생동감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해지지 않을까.
작가란 글 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통찰이 담긴 유려한 모옴의 표현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