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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Mar 14. 2021

별거 없는 내일을 기다리며

내가 본 드라마 우수작 분석

 나는 드라마를 끝까지 잘 보지 못한다. 심지어 그 유명한 김은숙 작가님의 <도깨비>도 엔딩까지 보지 못했다. 영화 <김종욱 찾기>의 여주인공마냥 엔딩이 기대와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사랑스러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저 흥미가 사라져서다. 엔딩까지 챙겨본 드라마가 많지도 않은 내가, 드라마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드라마를 쓰고 싶어 할까' 그리고 그런 내가 생각하는 '좋은 드라마는 무엇일까'에 대해 꽤나 오래도록 고민해왔다. 그리고 이 과제를 완성하면서 드라마에 대한 나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정리해보고자 한다. 최근 본 드라마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세 편 <눈이 부시게>, <미스터 선샤인> 그리고 <마더>는 역사라는 시대적 아픔과 함께 개인의 트라우마를 가족과 사랑을 통해 극복하고 성장하는 스토리 담고 있다. 그렇기에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좋은 드라마는 '역사', '트라우마' 그리고 '가족'이라는 삼 요소를 담아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풀어낸 작품이 <눈이 부시게>이다.


 <눈이 부시게>는 민주화 시대에 고문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을 키우다 치매에 걸려버린 노모의 이야기다. 한쪽 다리를 잃은 자신에게 늘 매섭던 노모에 대한 원망만 가득했던 아들은 그녀의 사랑을 깨닫고, 트라우마를 극복할 가능성을 찾는다. 타임워프라는 장르적 선택은 시청자로 하여금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접근케 했다. 시간을 돌리는 능력을 가진 여주인공 혜자는 20대이면서 80대고, 딸이면서 어머니이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자 손녀의 남자 친구인 준하와 복지관의 노인들의 가족들을 만난다. 그리고 작품은 트라우마의 시발점이자 치료의 종결점으로의 가족을 조명한다. 그래서 드라마는 2030과 노인세대의 간극을 줄이고 서로 간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여 시의성까지 획득한다.


 한국은 일제 치하, 남북전쟁, 급속한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을 한 세기 안에 겪어낸 나라다. 전 세계 유례없는 성장의 동의어는 유례없는 세대갈등이다. 뿌리 깊은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가족과 국가에 결속돼 희생당한 개인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돌볼 겨를 없이 달려왔고, 당연히 그들에게 삶은 늘 고통의 연속이었다. 배운 것이 불행뿐인 부모는 자식에게 행복을 가르칠 줄 몰랐고 그렇게 트라우마는 세습됐다. “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덴마크 소설가 이자크 디네센이 한 말이다. 유대인으로서 동족이 학살당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겪었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책에 인용하면서 유명해진 말이기도 하다. 내가 드라마를 쓰고자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를 구원할 서사, 누군가의 슬픔을 견뎌질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 슬픔이 나를 여기에 위치시켰다.


 우연히 발견한 글, 책 한 권, 멜로디 한 소절, 대사 한 줄이. 나를 이곳까지 이끌었다. 나는 내 인생을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이끌어왔다기보다 그저 우연성에 기대어 그렇게 선택이라 할 수 없는 선지를 고르며 살았다. 우연히 입학한 대학에서 문창과 수업을 들었고 우연히 적성을 찾았다. 취업을 하고자 매일 밤을 새우며 고시원에서 5년을 살았지만 우연히 코로나가 터졌고 가고자 했던 기업의 공채는 무기한 연기됐다. 그래서 돈을 벌면 언젠가 가볼까 했던 서울예대에 지원했다 우연히 합격했다. 어쩌다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다. 겨우 서른 해를 살며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를 내 인생을 탓하는 순간마다 '혜자'처럼 과거로 돌아갈지라도 우연히 만났던 그 작품들을 나는 버릴 수 없다. 그런 예술을 하고 싶다. 그 순간에 그 작품 말고는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런 문장과 드라마를 쓰고 싶다. 나중에는 무의미 해질 지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할 지라도, 상처 받은 사람들이 살아갈 문장 한 줄이면 된다. 그거면 족하다.


 상처 받은 이들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안고 흘러가는 대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선지들 중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익숙한 불행과 가까운 선지를 택하고 다른 삶을 살아볼 선지를 배제시킨다. 그리고 삶은 점점 악순환에 빠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에게 할리우드 영화 같은 버라이어티함도 로코 드라마와 같은 낭만적 사랑도 일일 드라마와 같은 평화로움도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도 다른 이들처럼 매일 눈을 뜨고 살아갈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들을 구원할 이야기를 쓰고 싶다. 너무 외로운 어느 새벽에 내가 책을 펼쳤듯이 그들이 찾을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 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는 뻔한 엔딩이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준 것은 그것이 곧 드라마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전원일기>와 <솔약국집 아들들>을 보지만 언니는 <도시남녀의 사랑법>과 <멜로가 체질>을 본다. 공통점이 드라마라는 것 말고는 전혀 없는 이 작품들을 우리 가족은 사랑한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를 보낸 우리가 별거 아닌 내일을 기다리지만 인생은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서사에 대한 갈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역사, 트라우마, 그리고 가족에 대한 드라마에 갈증을 느낀다.


 분량이 얼마 되지도 않는  글을 끝맺지 못해 꽤나 오래 망설였다. 사실  과제는 분량도 기한도 짧지만  인생의 가장 어려운 아직도 풀지 못한 질문이다. 나는  답을 찾기 위해 대학에 들어온 것이기도 하다. 기숙사에 짐을 옮기고 어지러운 룸메 없는  안에서 새벽에 홀로 1층에서 우연히 가져온 서울예대학보지에 허희 교수님이 쓰신 '예술에 기습당한 인생'이란 칼럼을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있었다. ‘너희의 드라마가 여기서 시작된다 극작과에서  끝을   있을  있을지 모르겠다. 흥미가 사라질 수도 있다. 별거 없는 내일이 기다리니까.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쓰는  나에게  행복보다는 익숙한 불행에 가까웠고 그럼에도  수밖에 없었다.  여정으로 나의 트라우마를 가족을 그리고 역사를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지긋지긋한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위로하고, 가족을 이해하여, 자신의 역사를 써나갈  있도록 돕는다면 유명한 드라마 작가가 되지 못할지라도   없는  여정은 가치가 있었고,  눈이 부실 자격이 있는 작가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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