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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May 09. 2020

작가, 그 타협의 시작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시작은 늘 아름다울까. 사람들은 시작을 설레는 일이라고 들 말한다. 모든 이의 시작은 항상 눈 부신 순간이었을까. 하지만 나에게 시작은 언제나 기쁨보다는 슬픔,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까웠다. 완벽한 시작보다는 타협해야 하는 어정 띤 어떤 지점.

 

 타협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던 내 시작들을 기억한다. 20살의 나는 가고 싶던 대학교에서 모두 불합격 소식을 들었다. 우울증이라는 변명 하에 열심히 살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마지막 남은 대학교의 발표날, 그마저도 떨어지리라는 확신을 안고 독서실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태어나서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태어나서 미안했던 그 날 하늘이 도운 것처럼 나는 대학에 합격했고, 가고 싶지는 않았으나 입학했다. 그렇게 겨우 대학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희생을 밟고 올라설 수 있었던 자괴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나는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절실히 원했던 회사는 아니었으나 달리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그 직장에서 내 직함은 '콘텐츠 작가'다. 나는 평생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이다지도 쉽게 내가 하는 일을 작가라고 말하는 것이 허무해 웃음이 나온다. 직장인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도, 고시원 생활을 시작했던 것도, 눈에 보이는 공모전마다 글을 보내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던 것도 모두 작가가 되고 싶어서였다.


  내가 다니는 광고 대행사에서 콘텐츠 작가가 하는 일은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이다. 광고주가 요청한 키워드가 검색어 상단에 늘 노출될 수 있도록 주어진 주제에 맞춰 글을 쓴다.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큼 적당히 유익하면서도 흥미를 잃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어조를 유지해야 한다. 논문이나 소설과는 달랐다. 아무도 읽지 않을 지라도 글이 지닐 가치를 생각하며 쓰는 글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내가 쓰는 글의 가치는 광고주와 구독자수가 결정한다. 그것이 내가 콘텐츠 작가로서 쓰는 글이다.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없던 시절, 나는 누군가에게 글과 함께 내 손을 찍어 올리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도 내 글을 클릭하고 읽어주는 사람도 있다고. 그렇게 구독자수가 늘게 되면 광고비가 붙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으니 그때 가서 네가 쓰고 싶은 글을 쓰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울기만 했다. 그때 나는 내가 울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도, 쓰고 싶었던 글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도 없었으나, 내가 존경하는 작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 믿었고 그런 작가가 되고 싶었다.

  

 이런 글일지라도 내게 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5년 전 이맘때 내가 벌 수 있던 돈은 호프집에서 성희롱을 들으며 하는 설거지 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흔한 시나 수필도 한 편 써본 적 없었지만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으며 호프집 카운터를 봤고 마감을 한 뒤 밤길을 걸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나는 작가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서 있는 이 길은 작가로의 시작점과는 너무 멀어 보여서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버티기에는 소위 설아픈 청춘이었다. 집 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소리 없이 울고 부은 눈이 잦아들 때면 그제서야 현관문을 열었다. 그때의 감정을 말로도 글로도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내가 밟고 싶었던 시작점은 내 몫이 아니었다. 그 시작점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자리였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내게 앞으로의 길은 더 쉽게 해낼 수 있다는 격려보다 어중간한 시작에 서기 위해 내가 울며 끝마쳐야 했던 끝들을 상기시켰다. 나의 시작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내 낮은 자존감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벽의 몰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을 썼다. 글은 내가 새벽을 견디고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멀리 볼 수는 없었다. 누가 나를 지나쳐 앞서가도 고개는 들지 않고 당장 내 발밑만 보며 걸었다. 달리기는커녕 잘 걷지도 못하는 나 자신이 싫어서 주저앉아 울 때가 많았다. 걷는 것조차도 숨이 차고 힘겨워 우는 나 자신에게 가야 할 때 가지 않아 가려하는 길을 갈 수 없게 만든 것이라 자책했다. 그렇게 줄곧 꾸준히도 나에게 가혹했다.


  인생에서 시작은 직선상에 있지 않음을 깨닫기까지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했다. 시작의 끝에는 결승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시작이 불러올 다른 시작이 두려워 사람들은 죽음을 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어도 다른 시작점이 시작될 때까지는 그 길을 계속 걸어야 하기에 나의 길이 불러올 또 다른 시작이 나는 여전히 두렵다. 그럼에도 나는 작가가 되고 싶다. 직장에서 퇴근하고 체력이 남을 때면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불안해하다가도, 일이 많아 홀로 사무실에 남을 때면 내 글이 아닌 글을 쓴다며 우울해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지키기 시작한 순간이 나를 쓰게 했음을 떠올린다. 나를 지킬 수 있어야 내 글을, 다른 시작을 시작할 수 있다.


 원하는 길의 시작점은 가서 서있는 곳이 아니었다. 간절히 바라던 일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은 우연히 찾아왔다. 좋아하는 책을 밤새 읽고 해 뜬 도서관 밖을 나설 때, 퇴고를 반복해 결과물이 만족스러울 때. 닥치는 대로 삶을 살아내다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벼랑 끝에 있다 믿었던 순간, 막다른 길에 들어섰다고 믿었던 순간, 내가 무너지기 바로 직전의 순간마다 하늘이 도운 것처럼 나를 끌어올리는 계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나를 살아있게 했다. 그래서 인생을 선물이라고 하는 것 같다.  예상하지 못한 길에서 이미 시작된 시작점을 발견하게 되니까. 이제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는 덜 울 수 있게 됐다. 아마 5년 뒤의 나는 보다 씩씩하게 걸을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감정의 파편을 적고 이 길을 걷는다.


 오늘의 시작과 끝은 이제 내가 정한다. 브런치에서 글을 시작한 것처럼 시작은 아침이 아닌 점심이나 한 밤중일 수도 있다. 외로움의 끝에서 뱉어낸 내 우울과 패배로 얼룩진 시작이 비로소 글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글이 스스로를 설 아픈 것이라 말하는 이들에게 덜 가혹해질 수 있도록. 당장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이 고통은 온전히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게, 단 한 걸음이라도 덜 외롭게 한 발을 내딛도록 할 수 있다면. 그를 실현하는 그 날에서야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작가라 말하며 헛웃음 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내 우울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작가로 향하는 길이라 믿는다.

 

 신은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더 큰 섭리로 당신의 먼 앞날을 걱정해주는 법이다. 작가로의 내 시작은 인간인 나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곡선의 길 위에서 신의 섭리로 이미 시작에 들어섰음을 깨닫게 되기를. 그래서 나는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작가로 절반의 길을 들어서고 나서야 그 의미를 진정으로 실감할 수 있길 소망한다. 다만 너무 많은 노력을 하고 지쳐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타협의 시작은 미약했을지언정 그 끝은 기필코 창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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