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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Aug 03. 2020

PMS와 우울증

약을 먹으면 무기력은 사라진다.

 분명 괜찮아지고 있었다. 보름 만에 무기력은 거의 사라졌다.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집중력이 이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10년 전 보다 너무 빨리 좋아지는 자신을 보며 역시 몸이 아프면 전문가를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래 때는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의사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에 바빴다. '의사 선생님들은 모두 위대한 분이시다!'라는 생각을 지닌 채 약의 부작용도 말끔히 사라져 갈 무렵, 잊고 지내던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여자였다. 한 달에 한번 오시는 그분이 2주 전부터 발작을 하는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자궁이 있다는 것이 원통할 정도로 우울증과 PMS는 끔찍한 하모니를 이뤘다. 이것은 마치 사탄들의 학교에 루시퍼의 등장이었다. 


출처 : SBS NOW 유튜브 채널, 황용식의 나쁜 남자 시절


 생리를 마냥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생리로 인한 호르몬 변화에 맞춰 글을 읽거나 쓰면 훨씬 풍성한 감정을 담을 수 있다. 어떨 때는 이성적이고, 어떨 때는 감성적이어서 한 사람이 두 명의 관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다. 이 능력을 글을 쓸 때 매우 유용하다. 내 기준에서 좋은 글은 한 달 내내 읽어도 늘 좋은 글이다. 그런 글은 감성과 이성을 고루 자극하는 글이라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글을 읽거나 쓸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생리는 그저 사람을 미쳐 날뛰게 만드는 신체 속 무소불위의 독재자였다. 모든 것이 생리로 인한 호르몬 변화로 의지가 아닌 몸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의지로 생활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내가 인간에서 퇴화한 그 어떤 생물체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 몹시 불쾌하고 고통스러우며 자책을 반복한다. '나의 조절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나'는 생각이 계속 자신을 괴롭힌다. 평정심을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일수록 더더욱 그랬다.


 그때부터는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속이 울렁거려서 정상적인 식사가 어려웠다.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식욕이라는 것을 잃어봤다. 사람이 어떻게 먹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다니. 20살의 우울증 때도 100만 원의 알바비를 모두 식비로 탕진했을 만큼 나는 먹고 싶은 것이 확실한 돼지였다. (참고로 돼지의 지능은 매우 높다.) 10년 전 무계획적 소비에 분노하며 등짝을 때리던 엄마조차 하루가 다르게 퀭해가는 내 얼굴과 급속도로 빠져가는 살을 보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여자들이 한 번쯤은 다이어트 롤모델로 삼는 김민희의 말을 공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먹는 것이 귀찮다 못해 힘겨웠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이렇게도 무서운 법이다. 


 어떤 날은 우유만, 또 어떤 날은 물과 약만 먹었다. 어떤 날은 샌드위치나 샐러드 외에는 음식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았다. 사람의 후각이 이렇게도 예민해질 수 있구나 싶었다. 먹고 싶은 걸 제발 사 먹으라는 꿈같은 엄마의 권유에도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액체 말고는 음식물을 삼킬 수가 없었다. 길을 걷다가도 신호등 불이 바뀔까 봐 잠깐 뛰었을 뿐인데 어지러움으로 주저앉았고, 길을 걸으면서도 멀미를 했다. 내 몸뚱이에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운동을 더욱 열심히 했다. 코로나 때문에 주 2회밖에 못 나가는 대신 강도를 높였다. 하던 운동에 추가적으로 버피 100개씩 하고 나니 집에 오면 아무거나 좀 먹을 수 있었다. 굴곡은 있지만 몸도 우울증도 상승곡선을 타고 있었다. 컨디션이 바뀔 때마다 나 역시 부지런히 대처법을 달리했다.


 달의 주기와 함께 날뛰는 몸뚱이가 절정을 이룰 때, 의사 선생님을 뵀다. 선생님은 내 낯빛과 한 주간에 진행상황을 전해 들으시고는 루틴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숙제를 한창 하고 있는데, 숙제하라는 잔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전교 1등만 하셨을 의사 선생님이 알리가 없다. 하지만 그 생각이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나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예, 예 알겠습니다.'를 성의 없이 반복하니 그 날은 선생님이 날 일찍 보내주셨다. '아픈데 빨리 보내주니까 고맙긴 한데, 포기한 거야 뭐야. 서운해...' 진료실을 나와 화장실을 갔더니. 

 

 아, 역시나. 템포 안 갖고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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