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 새옹지마
가시 없는 인생이 없고, 질곡의 세월을 견뎌내지 않은 삶이 없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만큼은 곧고 탄탄한 비단길이길 바라는 건 무얼까? 또, 깊은 절망의 늪과 거대한 산맥과 환희의 바다와 만나며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지도가 아니라 내가 의도한 대로 그리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기쁨에 춤을 추기도 하고, 때로는 감당 못 할 슬픔과 절망에 분노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나가는 게 인생인데도 말이다.
돌아보면, 내가 그린 선이 무엇과 만날지 어떤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갈지 전혀 알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곳이기에 두렵고도 아름다웠다. 모두의 삶이 그렇겠지만 내 삶 속에도 수많은 천둥과 가시와 비바람이 있었다. 도종환 시인의 ‘꽃’이란 시처럼 수없이 흔들리고 젖으면서 피었기에 곧게 설 수 있는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내일을 위한 점을 찍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장착할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 그동안 경제적으로나 자녀 문제에 있어 큰 어려움 없던 삶에 갑자기 큰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난생처음 맞아 본 토네이도급 회오리에 우리 집은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건설회사 현장소장이었던 남편과 정부 지원 기관의 기관장이었던 내가 생각지도 못한 퇴사 벼락을 맞은 것이다. 남편은 예정되어 있던 다음 현장이 우크라이나 전쟁과 금리 인상 등으로 취소되어 해고되었고, 난 근무하던 운영 주체의 내부 문제로 퇴사를 해야 했다.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날벼락 철퇴를 맞은 것이다. 근무했던 3년의 기간 동안 27년의 센터 역사를 통틀어 가장 좋은 실적과 평가를 받고 코로나 기간임에도 최고의 사업 수익을 냈음에도 말이다. 자리는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라 지역민이 아닌 내가 아쉽다고 했다. 그게 이유였다.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든 고통의 시간 속에서 발버둥 치고 억울해했다. 도대체 학연·지연·혈연이라는 게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드는지 피멍 들도록 삿대질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시리고 아팠다. 모두가 인정하는 일을 하고도 끝없이 추락해 버린 자존심은 온몸을 송곳으로 찌르고 장작불로 태우는 듯 아프고 뜨거웠다.
무엇보다 더 얼어붙기만 하는 건설경기와 5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다시 취업을 할 수 있을지가 더 걱정이었다. 다행히 큰아들과 딸은 취업을 해 걱정이 없었지만, 아직 공부 중인 막내아들 때문에 땅이 꺼졌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하고 싶은 거 하며 편히 쉬라고들 했지만 귓등에 스치는 바람처럼 허허롭기만 했다. 그렇게 애를 태우며 숯검댕이 가 돼 갈 때쯤 남편이 새로운 직장에 취업하며 경제적인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이젠 내가 일어서야 할 차례였다. 억울하고 분해서라도 일어서야 하지만 그들로 인해 빼앗긴 나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 보란 듯이 일어서야 했다. 왜 상을 받고 박수를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자꾸 뒤돌아보고, 작아지고 숨고만 싶어 지는지가 억울해 몇 달을 미친 듯이 살았다. 한 순간이라도 허투루 살면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아 새벽 4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죽을 둥 살 둥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그 치열함에 감복해서인지, 아니면 시간이 약이 되었는지 몰라도 아픔의 강도가 차츰 무뎌지고 숨이 쉬어지기 시작했다. 뽑히지 않을 것처럼 깊이 박혀 있던 대못이 조금씩 뽑히고 또 다른 삶을 꿈꾸는 나로 돌아가고 있음도 느껴졌다. 아픔의 길이가 길고 상처의 골이 깊었던 만큼 치유의 시간도 길었지만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깨닫고 편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 치열함 속에서 난 노력은 헛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진리와 비움과 초월함을 배웠다.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 단단해지는 무쇠처럼 연약하기만 했던 심지가 더 단단해졌고, 어떤 비바람에도 끄떡하지 않을 강인함도 새겼다. 그러기에 마냥 밑지는 장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앞으로 살아갈 더 거칠고 험난한 세월을 위한 예방주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건 아마도 그래서 일께다.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아니 다시 취업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사실 더 공포스럽고 두려웠었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온 그동안의 삶이 헛되지 않았는지 여기저기서 제의가 들어왔다. 모 기관의 센터장과 다른 기관의 사무국장, 또 직업상담사 자격증 과정 강사까지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질긴 상처의 터널을 잘 통과했다고 주어진 ‘행복한 고민상’인 것 같아 뿌듯하다. 그리고 어제 또 다른 곳에서 이력서를 보내라는 연락이 왔다. 이래서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나보다. 찬란한 햇빛 속에 숨겨져 있던 먹구름과 그 뒤에서 또다시 빛날 찰나의 순간들을 전혀 알 수 없으니 그저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릴 수밖에...
죽도록 힘들어도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그 터널 끝의 빛줄기를 잡을 수 있고 또 다른 기회의 땅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 수 있다는 힘을 가르쳐 준 그 회오리가 이젠 오히려 감사하다. 빨간 머리 앤이 ‘지금은 길모퉁이에 서 있다며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멋진 것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 길에 초록빛의 영광이 있을지, 캄캄한 어둠의 상처가 있을지는 모르지 담담히 걸어갈 초특급 엔진을 장착한 것만은 확실하다. 앞으로 다가올 나의 미래가 더 기대되고 가슴 떨리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