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들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우리가 건물을 만들지만 이 건물들은 또한 우리를 만든다”
(윈스턴 처칠, 1960년 인터뷰 중)
신기촌시장은 큰 아파트 단지 옆에 있다. 시장 윗편에는 나중에 큰 아파트 단지가 둘러서지만 원래 시장아이들은 돌산이라고 이름 부르는 산이 있었다.
어른들은 돌산을 절대 가면 위험하다고 온갖 무서운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을 못 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서움을 극복한 건지 못 들은 건지 몇몇 아이들은 돌산에 갔다. 결국 어느 이름 모를 아이들 중 한 두 명이 돌산에 아파트를 짓느라고 다니던 공사차량에 크게 다쳤다느니 죽었다느니의 소문이 돌고 나서야 아이들은 돌산에 가지 않았다.
시장 아래편에는 큰 은행이 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돈을 벌고, 은행에 가서 계좌에 돈을 저금하고 부치고 하는 곳. 시장 사람들이 웃을수록, 은행의 직원들도 웃었다. 은행이 붐비는 날에는 시장 사람들이 장사가 잘 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큰 은행 맞은편으로는 병원들이 둘러싸고 있다.
지희가 자주 가는 병원은 여자의사선생님이 진료를 보는 소아과병원. 시장사람들의 아이들을 진료하다보니 선생님도 말이 빠르고 진료도 금방 끝난다. 엄마들이 얼마나 바쁜지를 아는 여의사. 그리고 그 의사의 손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과 아이들.
돌산 바로 밑 부터 큰 길까지 한 블럭을 크게 차지한 신기촌 시장 안의 모습을 지희의 마음속으로 지도로 보자면 크게 ㅌ자 모양이다.
제일 윗쪽의 길은 과일 가게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그리고 ㅌ자의 세로길에는 시장의 가장 큰 골목이 있다. 이 골목들에는 생선, 과일, 채소들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다. 장씨 아저씨네 계란 가게도 있고, 말총 머리 할머니 가게도 있고 뎀부라 아저씨네 가게도 있다. 중간의 가로길은 메인 골목에서 가장 중요한 골목인 우체국과 병원으로 가는 길이다. 이 길에는순대골목도 있다. 그리고 가장 아래 가로길은 큰 슈퍼들이 포진한 길이다. 이런 큰 길들은 시장에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을 위한 다수의 공간이다.
반면, 큰 골목을 곁가지로 있는 수많은 세로 골목들은 시장 사람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생활을 위해 자연스레 생겨난 골목이다. 지희가 사는 골목는 시장에서 곁가지로 이어지는 골목이다.
지희네 골목은 작은 슈퍼집을 지나 방앗간과 무당집, 긴 골목을 지나 돌산으로 넘어가기 직전 교회와 세탁소까지다. 세탁소는 컴퓨터 세탁이라고 써있는데 컴퓨터가 보이지 않는데 왜 컴퓨터 세탁이라고 써있는지 모르겠다. 지희네 미용실, 또다른 미용실, 정육점, 슈퍼, 방앗간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은 집들이다. 집 문들이 다 미닫이 문으로 되어있다.
시장골목 아이들은 집이 가게이고 가게가 집인 아이들이다. 이 동네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할 때도 대장놀이를 할 때도 반칙을 하거나 불리해지면 자기 집으로 쏙 숨어버린다. 가게들은 거의 손님이 들어오기 쉽게 문이 열려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문을 열 필요도 없이 자기 가게로 들어가버린다. 가게집이 아닌 동네 애들은 그건 반칙이라며 아우성이지만 이 아랫동네 가게집아이들은 혀를 낼름하며 약오르게 집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그러다 슬며시 언제 그랬냐는듯 끼고 아이들도 원래 그런 아이들을 받아준다.
지희네 골목을 나와 채소 골목과 88슈퍼 사이로 지나 가면 나오는 따닥따닥 붙어 있는 가게들은 해가 들지도 않는 까만 골목들 사이에 있는 골목이 있다.
이 골목에는 간판이 제대로 있지 않은 이불집들과 한복집들이 있다. 이곳들은 곧잘 손님들이 지나다니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불집들에는 손님들이 늘 있기 마련이다. 주인아줌마들과 손님들이 긴 이야기를 한다. 이불집에서 이불을 사는 것는 자기가 어떤 이불을 좋아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이불을 사야하기 때문이다.
큰 골목이 손님들의 바쁜 용무 즉, 식재료를 사서 식구들을 먹여야하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바쁜 시간의 공간이라면 이 이불집 골목은 취향의 공간이고 느림의 공간이다.
자기의 취향을 맞춰 이불을 고르고 옷을 고르고 하다보니 당연히 가슴 속 할 말이 가득 쌓여있는 손님들이 시시콜콜한 일상들을 주인들과 이야기하느라 시간이 느리게 간다. 한복을 입힌 마네킨들 사이로 사이즈도 재고 이 옷감 저 옷감을 골라가며 이야기를 한다. 한복집들은 늘상 손님들이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다.
다른 골목보다 약간은 어둡고 사람이 많지 다니지않는 이 곳. 이 긴 골목의 주인공들은 한복집 주인들도 손님들도 아니다. 남자 아이들이다.
이불집 가게들은 사람들이 붐비지도 않지만 사람들이 사는 동네하고 이웃하고 있지 않다. 누가 갖다 놨는지, 누가 주인인지를 알 수 없지만 작은 전자오락기들이 몇 개가 있다. 몇 대 밖에 되지 않는 허름항 전자오락기 앞에서 아이들은 동전을 갖고 와서 같이 한다. 형들은 시시해서 안 할 것 같은 오락기를 서로 돌아가며 서로 킬킬거리고 구경해주면서 게임을 한다. 이불집 한 여자아이는 피아노를 잘 친다는데 엄마가 한복을 만드는 날은 늘 혼자서 놀아서인지 원래 손으로 하는 것을 잘해서인지 이 동네에서는 이 여자아이가 게임을 제일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 이 아이가 게임기를 하고 있으면 동네 꼬마아이들은 뒤에서 이 아이 뒤통수를 놀란 토끼눈으로 쳐다보며 구경하기도 한다.
골목과 골목 사이, 가게와 가게 사이를 뛰어다니며 아이들은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배워간다. 골목 골목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아이들의 목소리, 뛰는 소리들로 채워져 빈 공간이 아닌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시장을 시장답게 해준 것은 물건을 사러오는 손님들이었지만 시장을 사람답게 사는 곳으로 만들어준 것은 골목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