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구멍을 뚫다
"모든 독서 행위는 우리 자신에게 이름붙이는 방식을 찾아가는 진정한 길이다. 혹은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사람들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더 이상 이방인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 애너 퀸들런, 작가)
지희는 기도했다. '제발 남자 선생님은 안 되게 해주세요. 제발'
지희의 담임 선생님은 1학년 때도, 2학년 , 3학년 때도 모두 다 남자 선생님이었다. 옆 반의 여선생님이 계실 때 지희는 부러운 눈으로 힐끗 힐끗 쳐다보았다. 부끄러움도 많고, 겁도 많은 지희는 4학년 담임선생님은 부드러운 여자 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4학년 첫 날, 지희의 담임 선생님은 임신을 한 젊은 여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밝은 갈색 염색을 한 파마머리의 선생님이었고 화를 내지 않는 조용조용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임신을 해서 서서 수업을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앉아서 수업을 했는데 지희는 앉아서 수업을 하는 것이 미안한 일인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지희는 어른이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한 것이 어색했다. 지희의 인생에서 누군가 어른이 지희에게 미안해한 적은 거의 없었으므로.
그래서일까. 지희는 선생님이 더 좋았다.
그 어떤 아이보다 빛나는 눈을 가진 지희는 말이 없지만 그 말간 눈으로 선생님의 말을 다 흡입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많이 시켰다. 아이들은 늘 선생님을 좋아했고 글쓰기도 좋아했다. 지희도 선생님이 책을 읽어주는 것이 좋았고 선생님이 글쓰기를 많이 시키는 것도 좋았다. 처음에는 쓸 말이 없었는데 말수가 적은 지희는 자기 생각을 글로 쓰는 게 힘들었지만 동시에 재미있기도 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글 중에서 제일 잘 된 것을 뽑아주고 나서 원고지에 글씨를 바르게 써오라고 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글들을 모아서 문집으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문집의 제목을 아이들보고 직접지어보라고 말했다.
아이는 문집의 제목을 뽑는다는 말에 무엇을 제목으로 내야할 지 설레었다. 하얀 얼굴을 가진 맑은 목소리의 선생님의 눈에 들고 싶었다. 선명한 색의 옷을 입은 아이들보다도 더 선생님의 눈에 들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는 재주도 없고, 예쁜 옷을 가지지는 못해서. 지희는 더 선생님의 눈에 들고 싶었다.
친구 진주가 물었다.
“지희야, 뭐 생각해 놓은 거 있니?”
지희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든다. 지희는 고민에 빠졌다. 문집의 제목으로 쓸 멋진 말들이 생각나지가 않았다.
“파란 나라? 이건 별로야.
예쁜 마음? 이것도 별로고..”
그러다 아이는 집에서 읽은 어떤 책의 제목을 떠올리고는 문집 제목 공모에 적었다.
'연필로 그린 어린이 세상'
문집 제목 발표날. 선생님은 눈을 반짝였다.
“이번 공모의 제목은 <연필로 그린 어린이 세상>이야. 지희가 뽑혔어. 축하해, 지희야“
지희는 학교에서 단 한 번도 손을 들고 발표를 해본 적도, 아이들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건 적도 없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지희가 교실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무채색과 같았던 지희의 세상에 첫번째 색깔이 들어왔다.
빛이 구멍을 뚫었다.
지희는 알게 되었다. 글의 힘을. 글자들의 힘을.
종이와 연필의 힘을. 하이얀 종이에 글씨가 쓰여지고 그것이 문장이 되면 힘이 생긴다는 것을. 그리고 책을 읽으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언어를 쓸 줄 알게 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아이는 다짐했다.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서 움직이리라.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