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장난감
I never knew a book could be such a joy to the touch.
(헬렌 한프, 채링크로스 84번지)
지희가 아빠의 책장에서 책을 꺼낸 것은 아주 어렸을 적이었다. 아주 어렸을 무렵 남매들의 장난감은 아빠의 책이었다. 변변한 장난감 없이 자라는 아이들로서는 아빠의 책을 꺼내 도미노 게임을 해서 쓰러뜨리고 책으로 집을 짓거나 책을 펼쳐서 밟고 다니는 일이 아이들이 즐기는 일상이었다. 그마저도 재미없어지면 색연필로 책을 낙서하는 것이 수순이었다. 아이들이 낙서를 하는 날은 큰 꾸지람을 했다. 별 큰 소리를 낼 일이 없는 아빠는 책에 낙서를 하는 일에는 유별나게 화를 냈다. 아주 어릴 때의 지희는 책에 낙서를 못 하게 할 때마다 ‘종이가 있는데 왜 그림을 못 그리게하지?'라고 생각했었다. 어린 지희는 이해하지 못할 아빠만의 세계가 바로 이 시장 속 아빠의 책장이었다.
집에 책들이 있는 이 가게집은 이 동네에서는 섬이었다. 같은 동네에서 살지만 섞일 수 없는 집.
물과 기름 같이 섞일 수 없는.
아빠는 동네 아저씨들과는 달랐다. 한문이 섞인 신문을 첫장부터 끝장까지 세심하게 훑어보는 남자. 바둑을 두러가거나 책을 보는 남자. 크게 소리질러 싸울 줄도 모르고 욕도 찰지게 못하고 옆집 아저씨처럼 울룩불룩 덩치를 자랑할 줄 모르는 그런 책만 보는 남자. 동네 사람들과의 대화가 아빠도 재미없었지만 동네 사람들에게도 지희 아빠는 재미없는 양반이었다.
지희가 아빠의 책들 제목을 읽어보면 책들의 제목은 어린 지희가 이해하기 힘든 제목들 뿐이었다. <이반 일리히의 죽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등등 지희로서는 잘 알길이 없는 어려운 제목들의 연속.
엄마는 그렇게 책 많이 읽고 똑똑한 양반이 왜 동네 사람들하고 싸울 때마다 가만히 보고만 있냐고 타박을 한다. 그렇지만 지희는 아빠는 부끄러움이 많아서일거라고 지희는 생각한다. 처음 지희가 다른 집에 놀러갔을 때 다른 아빠들은 책이 없고 아빠들은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놀라웠다. 지희의 세계에서는 어른들은 특히 아빠는 책읽는 사람인데 다른 집은 그렇지 않다니. 다른 세계의 아빠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지희로서도 그려지지 않은 모습이지만..
그런 아빠의 책이 지희와 아이들 덕분에 찢겨서 아빠는 속상해한다.
지희는 아빠의 책이 나가고 간 자리에 엄마가 위인전 한 질을 주문해서 놓고 간 것을 본다. 아빠의 책의 자리 옆 지희와 동생들의 책의 자리. 아빠의 다른 책들 옆에 우리들의 책이 있구나. 새로운 경험.
지희와 동생들은 자신들의 책이 집에 있다는 게 새 책이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만지고 또 만지고 셋이 바닥에 주루룩 누워 같이 책을 본다. 아빠가 왜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지를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새책의 감촉을 느끼며 아빠는 아마도 책 내용만이 아니라 책을 만지고 넘기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 느낌 때문인가보다며 지희 나름대로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