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마음을 치유하는 약
군인들은 주머니에 담배를 가득 챙기고 초코바를 한움큼씩 챙겨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물건은 뭐니 뭐니 해도 진중문고였다. 특수서비스국 한 장교가 회고한 것처럼, 출동 집결 지역은 긴장감이 맴돌았고 그런 상황에서 책은 “많은 군인들이 절실히 필요한 오락을 제공해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전쟁터로 간 책들 > 중, 몰리 굽틸 매닝)
긴 기간의 월남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아빠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다시 빈 주먹. 하지만 하나만은 알았다. 살아돌아 왔으니, 살아야겠다. 죽지 않고 살아야겠다.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나인데 무엇이 두려울까. 살고싶어진 동안 그는 책을 모았다. 읽고 읽고 또 읽고. 그는 자신만의 조용한 방식으로 치유하고 있었다. 밤새 전장에서 행군하면서 싸우는 꿈을 꾸고 난 후 그는 늘 을지로로 향했다. 서점에서, 헌책방들에서 자신만의 책을 사서 부천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다지 외로운 일은 아니었다.
전장에서의 끝없는 소음들, 그 긴박했던 그 시간들보다는 더 긴 기간동안 그는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했다. 그렇게 정처없이 거리를 쏘다니고 서울을 다니다가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그가 더 이상은 부유하는 인간인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떠돌이처럼 살다 ,
바람처럼 살던 그에게,
책은 몇 안 되는 아니 가장 소중한 물건이며 친구이며 마음의 고통을 달래는 약이었다.
그런데..
아이 셋을 연달아 낳고 보니 아이들은 그의 책을 놀잇감으로 삼았다. 그의 청춘의 기억이 있던 곳들의 기억, 책장 맨 앞에 날짜와 책을 샀던 장소들을 메모해 놓은 그의 글씨 위로 색연필이 칠해지고 책장이 찢어지고 딸아이가 공주님을 그렸다. 아이들은 그의 책으로 집도 짓고 탑도 쌓고 도미노 게임을 했다.불뚝불뚝 화를 잘 내고 성질이 급한 그이기에 아이들에게 불같이 화도 내보고 아내에게도 말해보지만 어린 아이들을 말려보아야 없는 살림에 아이들이 놀 것이라고는 그의 책뿐이었다.
결국 그는 상태가 안 좋은 책들을 모아 고물상에 내어주기로 했다. 책이 나가던 날 밤 그는 마음이 쓰라렸다. 책을 엉망으로 만든 아이들을 다그치다가 아내가 면박을 주기에 화가 나 집을 나섰는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낳은 내 새끼들인데, 어쩌겠나. '
괜히 화를 내고 나갔다가 일찍 들어가니 겸연쩍다. 그를 보자마자 큰 아이가 운다.
' 아빠 미안해요 한다.' 나머지 아이들도 운다.
그의 마음 속 아이도 어쩔 줄 몰라하며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