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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선미 Nov 23. 2018

우산에게 내어 준 동그란 귀

장철문, <우산을 받고 걸으면>

우산을 받고 걸으면

장철문


가을비에

우산을 받고 걸으면

빗방울이 말을 걸어


빗방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자꾸만 말을 걸어


집에 닿을 때까지

귓바퀴를 두들기며

말을 걸어


우산을 접고 들어서면

친구를 밖에 세워둔 것 같아


⟪동시마중⟫ (2017년 9・10월 호)



뻐꾸기 우는 때 떨어지는 감꽃은 여름이 시작되었다고 속삭이는 입술이다. 긴 가뭄 끝자락에서 하늘하늘 피어나는 자귀꽃은 장맛비를 바라보는 눈동자다. 뻐꾸기와 감꽃이 열어준 여름을 지나 지금은 가을. 동그란 우산 귓바퀴를 달고 빗방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가을비 속을 걷는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벗을 '지음'이라고 한다는데, 아이와 가을비는 아직 백아와 종자기만큼 오랜 시간을 보내지는 못한 모양이다. 아이와 올해 가을비는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사이. 빗방울은 말을 거는데, 자꾸만 말을 거는데, 아직은 빗방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귓바퀴는 점점 더 동그래지고, 아이는 점점 더 골똘해진다. 우산과 빗방울과 아이가 함께 가을을 걷는다. 뻐꾸기와 감꽃에게 내어준 목소리가, 자귀꽃에게 내어준 시선이, 우산에게 내어준 동그란 귀가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친구들은 그 시간 속에서, 계절이 약속하는 특별한 사이가 된다.



[⟪도서관이야기⟫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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