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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순승 Sep 14. 2024

떨켜

       

당분간 네트워크를 모두 차단합니다

폐업은 아니고요 

개점휴업이라고나 할까요

신문도 커피도 애인도 당분간 사절입니다     

겨울잠을 자려는 건 아닙니다

늘어진 나이테의 두께와 번진 색깔을 여밀 때가 된 거 같아요

맞아요 내부수리예요     

군더더기를 벗고 내 안을 들여다보려는 거죠

내가 내게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보려는 거죠

속살을 만져 보려는 거죠     

잉잉 마른가지로 소리 내어 울어 볼 참입니다

속없이 웃어도 볼 겁니다

햇살이 눈살이면 어때요 볼 테면 보라지요     

춥지 않겠냐고요? 

비밀인데요 

잉여의 붓기를 부추기는 입과 귀를 막아요     

생의 노역이 서쪽으로 옮겨 가는 시간

골똘하게 

흐트러진 기운을 모아

다시 봄날로 의역을 하려는 거죠

퇴고 중에는 건들지 마세요

툭담          

마른 장미가지 끝에 핀 드라이플라워     

허공처럼 가벼워진 체위

겹겹 페이지마다 편년체 에필로그 차곡차곡 적어 놓은 

마침표 

한 송이     

그도 한때는 욕망에 이끌려 

거침없이 

타오르던 불의 종족     

생을 불사르던 그 자리 

한철 자태 그대로 

꽃물 한 방울까지 내려놓은

저 깊은 꽃의 경전 

죽은 듯 살아 있는     

탯줄 움켜쥔 응집된 부호     

적멸이고

선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툭담*     

햇살의 조문 경건하다          

* Thukdam: 특수하게 죽은 이후에도 유지되는 깊은 명상을 뜻함

슬기로운 생활



도서관 문이 열릴 때마다 자음 모음 허리를 편다

삐딱 기운 고딕들 눈꼬리 내려 각을 맞추고

두꺼운 표지를 갈아입은 위인 먼저 손을 내민다

소설은 말초적이고 전개 빠른 팩션*으로

묵직한 개념은 관념의 굴레를 벗고 가벼워져야겠다


첫 줄부터 익숙은 버리고 낯설어야 축에라도 낄 판

쏙 뺀 눈물로 커피를 끓일 수 있을 만큼 슬프거나 웃기거나

흐름을 이끌어 가는 메시지를 툭툭 던져야 간택이 쉽다

사랑이나 이념에 국경을 내비치는 건 꼰대로 가는 지름길

혼자 취해 느슨해진 문장일수록 먼 그대

시간에 갇혀 프로이트나 공자만 읊다가는 뒷방 일 순위


토씨 빼고

푸념 떼고 

머리 꼬리 잘려 나간 저 세상 말 못 알아들어도 제스처는 될수록 크게

나이의 두께가 굵은 활자일수록

군살 없이 단출한 멀티 시스템으로

날렵한 변신은 

선택이 아닌 필수 덕목


새파랗게 밀어닥치는 새 물결에 밀리지 않고 목소리 한 줄이라도 읽히려면

날개가 해질 정도로 

파닥거리는 것이 앞줄에서 살아남는 길          

* 팩트와 픽션을 합성한 신조어

표정 관리를 먼저 배워야 해요          

탯줄에서 떨어진 나는 엉덩이가 아파 울었어요

버둥거리는 몸부림이 우스꽝스러웠겠죠     

어릿광대인 나는 매일 외줄을 타요

뒤를 부추기는 익명의 엇박자 추임새 발밑을 안개로 흘러요     

갈채의 등을 본 적이 있어요 

돌린 등은 꽃샘보다 추워요

변덕 심한 소문처럼 줄을 흔들어요 자칫 휘말리면 발이 삐끗하죠

삐끗의 단면을 잘라 보면 꼬인 실타래이거나 닫힌 개미굴이거나

귀가 얇다 보니 낱말이 뒤섞여 흩어지는 브레인포그     

기온 차에 진눈깨비 방식으로 쿨럭이는 딸꾹질 

스며들지 못하고 속눈썹에 맺히려는 물의 조각 같아요

발등을 찧지 않으려면 덩어리가 되기 전에 닦아야 해요

자욱한 저의는 이스트를 넣어 반죽

허술한 틈새로 먼 데까지 부풀거든요     

바람을 빼 보려 그렁하게 쏘아붙인 눈빛의 반사로

달아올라 물들기 시작한 사과빛 내 얼굴

지워 내도 숫기가 없어 금세 붉어지죠     

표정 관리를 먼저 배워야 해요

입 다문 바다와 다르게 출렁이는 파도의 소란이라든지 

필라멘트 끊어진 어둠도 얼굴 바꾸어 환해지는 알전구처럼요     

바람에도 근육이 자라죠

근육의 탄력에 흔들림을 실어요 

엇박은 한 발 늦춰 밟아도 괜찮아요

날개를 펼쳐요 얼굴 따윈 이제 붉어지지 않아요

퉁퉁마디          

낸들 뭉툭하게 살고 싶었겠느냐고     

썰물 따라 갈매기도 빠져나간 뻘밭

살붙이끼리 어깨 비비며 살라고 

선친이 넌지시 씨앗 떨구어 놓은 자리

한 발을 빼면 다른 한 발을 잡고 늘어지는 세상

전 소금기에 뿌리 담그고 살다 보니

물 켠 손가락 마디 퉁퉁 불었다고

팔다리 매끈하게 뻗은 갈대로

낸들 멋 부리며 살고 싶지 않았겠느냐고

그래도 뜨거운 이력 차곡차곡 쌓다 보니

이 나이면 누구나 하나쯤은 지니고 있는

당뇨 고혈압 관절염 하다못해 배앓이 한번 없이

힘살 야드락지게 들어차지 않았느냐고

처음이 어렵지 안면을 트고 나면 

아른거리는 뒷맛에 목젖 아래 은근 단물 고이는

버릴 곳 하나 없는 퉁퉁마디처럼

모양새 뭐 그리 중하냐고

사람이든 갯것이든 속이 찰져야 되는 거라 곱씹으며

이 빠진 소쿠리여도 건어물서껀

부둣가 어물전에 한자리 차지하고 소복하니 앉아 있는 알짜배기 

뻘밭 굳은살 쪼개는 땡볕을 이고도 

오뉴월 염천이 삶아 대도 

시들거리지 않고 짠내 새파랗게 딛고 살다가     

서천 꽃밭 발갛게 물들이셨던

소래포구 난전 할머니 

안팎



문은 나와 나를 나누는 선

안의 나와 밖의 나를 거울처럼 아는 녀석이죠     

열쇠는 둘만이 읽어 내는 엇나간 생각의 퍼즐을 조합하여 만들어요

특수문자는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해요

감추고 싶은 얼굴이 많아질 때는

트라우마 두어 조각 불러들여 거기에다

껄끄러운 기억 몇 개 섞으면 그만이죠


문을 나서기 전 민낯을 감추어야 해요

얽히고설킨 표정이 단순하고 낯설어질 때까지 

감쪽같이 정교해야 녀석의 문턱을 넘을 수 있으니까요


삭이지 않고 붓기를 살찌우는 울음보는 토너와 로션으로 다독 양 볼에 꽉 들어찬 골칫덩어리 욕심보는 리프팅크림으로 바짝 당겨 올리면 들통은 일도 없이 걱정 끝 문제는 꼬투리만 있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퉁대는 찜부럭 심술보인데 컨실러로 꾹꾹 눌러 감춘 것은 신의 한 수지요 마무리는 립스틱으로 명랑하거나 다소 과장되게 


그렇다고 습기 덮인 속까지 다 가려지는 것은 아니어서 기압골의 흐름에 따라 닫았던 문을 빼꼼 열고 밖을 살피기도 하지요 낌새를 알아채 주는 눈이 없어 외로움이 부풀어 떠다닐 때는 젖은 낱말 몇 개 슬그머니 양지에 내어놓지요


이때 노루발로 녀석을 허문 햇살의 따끔한 간섭은 

제법 쓸모 있는 형식이죠     

자, 나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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