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anist 조가람의 클래식 에세이]
그 어떠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인생은 아름다워’. 애수와 애환, 폭력과 비 정당성, 때로는 온당한 흐름과 예기치 못한 축복 혹은 불행, 온정과 희생, 서늘하다 못해 시린 현실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세기말, 그 영화는 말했고 전 세계인은 사람과 삶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다.
필자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사람과 삶을 생각한다. 필자에게는 클래식 음악 또한, 그러한 부류의 아름다움이다. 흔한 클리셰인 ‘가까이하기에 어렵고도 먼 당신’이 아닌, 그 많은 감정의 카타르시스와 인생의 기록 인터. 생생히 아름다워 때로는 뜨거운 커피가 가슴을 타고 내려가듯, 가슴속에 실제로 흐르는 듯한 생경한 자극에 아찔하기도 할 정도이니. 현학적 정념의 청각 화도 지성의 상아탑도 아닌, 클래식 음악은 내게 실존인 것이다. 피아니스트로 살아오면서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 실재감은 한결같다.
피부로 느껴지는 듯한 감정의 파장. 청자로서 나는 묶인 끈을 풀고 파장의 쾌락에 몸을 던져 지극히 수동적으로 넘실거리고야 마는, 음악의 종이 되고야 마는, 행복하고 순수한 쾌락주의자인 것이다. 업으로 삼아 고군분투하면서도 질리지 않고 순수한 청자로서 살 수 있는 행운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단순한 취향의 문제일까. 나의 소우주를 돌아본다.
아름다움이 스며들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 감각 인상의 종류와 그 원인이 되는 물리적인 자극 사이에는 1대 1의 대응이 있지만, 때로는 이 원칙에 반하여 음파가 귀에 자극될 때 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색상을 느끼거나, 후각과 함께 혹은 글씨를 보고 냄새를 느낄 때도 있다. 이와 같이 각기 다른 감각의 경계가 연결되는 감각 현상이 공감각인데, 이러한 상호 영향은 살면서 겪는 경험과 결합하여 무의식에 머무르다 부지불식간에 발현된다.
그것은 한 사람의 취향의 뿌리가 되기도, 재창작과 재해석의 영역에 서있는 연주자의 상상력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최초의 공감각의 기억은 만 네 살, 첫 연주회 때이다. 프로그램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제5번으로 F sharp minor의 솔로 버전이었다. 연주회를 준비 중에 나는 고전 소설 <작은 아씨들>에 푹 빠져 있었는데, 무대에서 연주하는 중에 스스로의 단조 곡 연주가 어찌나 슬프던지 성홍열에 걸린 베스가 떠올라, 어렴풋이 이해하는 죽음과 헤어짐의 슬픔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켰다. 이 기억은 내가 클래식 음악을 학구적 예술이기 이전에 어느 종류의 일차적 감각과 감정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순간. 몇 년뒤, 또 다른 기억이 있으니, 아버지의 손을 잡고 조금 늦게 도착한 영화관의 문이 열리며 쏟아지듯 들려온 영화 <아나스타샤>의 OST는 경쾌한 왈츠 리듬이 단조의 구슬픈 조성에 얹혀있었다.
누더기 옷을 입은 잊힌 공주의 어렴풋한 기억을 그리워하는 춤이 자아내는 역설적인 미와 반어적 음악과 한 데 어우러졌다. 그 패러독스의 심상은 당시 연습하던 F.Chopin의 B minor Waltz 곡을 이해하는 영감이 되었다. 여전히 경쾌한 템포의 단조 왈츠를 들을 때면, 잊힌 공주의 춤이 떠오른다.
길을 가다가 스치는 향수 내음에 옛 연인이 떠오른 적이 있는가? 우연히 찾은 식당에서 뜬 첫 술에 할머니의 된장찌개가 떠오른다면, 오랜만에 들은 옛 노래에 그때 그 시절의 감정이 불현듯 피어오른다면, 당신도 공감각의 경험을 하는 중이다.
틀고, 듣고, 들르다
<틀다>
아침 일정 시작 전, 아무리 급하더라도 심혈을 기울이는 행위가 있다.
바로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 들을 음반을 고르는 일. 젖은 머리카락이 채 마르기도 전에 뛰어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음반을 고를 때만큼은 숨죽이고 고민하는 것이다. 이는 아버지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획득 형질은 유전이 되지 않는다는데, DNA에 새겨져 있는 것 마냥 아버지의 많은 습관을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아침에 눈을 뜨시면 직접 만드신 스피커와 진공관, 그리고 기분에 따라 LP를, 때로는 CD를 연결해 음악을 틀어 놓으셨다.
레퍼토리는 주로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나 쉔베르크의 정화된 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라흐마니노프 심포니의 느린 악장들, 슈베르트의 가곡 따위의 애수가 넘쳐 한마저 느껴지는 단조의 클래식 곡, 그리고 한 달에 두어 번은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경쾌한 심포니를. 부엌 옆에 붙어 있던 내 침실로 들려오는 밥솥이 들썩거리는 소리와 지단 부치는 고소한 냄새, 클래식 음악은 일종의 아침 의식이었다. 잠들기 전 읽은 책의 내용, 간 밤에 꾼 꿈과 현실이 잠결 속에서 문 틈 사이로 들려오는 음악과 뒤엉키면, 나는 일어나기 전 이런저런 몽상에 잠겨 잠시 숨을 고르곤 했다. 그리고 그 날, 학교를 마치고 연습실에 들어가면 혼자만의 세상에서 연습하던 곡을 아침의 몽상과 연결 지었다. 피아노 레슨을 받는 것에 큰 흥미가 없던 나에게는 제멋대로의 해석이었을지언정, 아침의 음악 소리가 곧 스승이었다. 몽상을 소리로 실현시키는 것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아버지는 퇴근 후 자주 ‘이 곡을 들어보자’ 하며 이런저런 음반을 들려주셨고, 또 같은 음반을 각기 다른 스피커로도 들어보며 소리를 비교해보았다. 별다른 클래식 음악에 대한 교육과 배경 지식 없이 우리는 한 팀이 되어 머리를 맞대고 비평가 놀이를 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음악 교육이 아니던가. 음악은 이렇게 삶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듣다>
나는 스스로 듣기 시작했다.
여전히 찾고 듣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고 있지만, 어린 시절 들었던 곡들은 유독 강렬히 마음에 남아 현재까지 영향을 끼친다.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산 음반은 에브게니 키신의 쇼팽 발라드 전 곡 앨범이었다. 연습실 창가에 앉아 성당의 초를 켜 듯 경건한 마음으로 포장을 뜯었다. 중학교 1학년, 가을날이었는데 홀로 앉아 듣는 쇼팽 발라드 4번은 참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에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구나. 그 길로 연습을 시작했다.
느끼는 대로 연주하고 싶어 선생님께도 비밀로 하고 시작한 연습은 듣고 쳐보고의 반복이었다.
들은 아름다운 곡이 내 손에서 피어나는 놀라움에 당시에는 독학이라며 스스로가 뿌듯했었으나 생각해보면 키신이 내 스승이었고 듣는 것이 수업이었던 셈. 듣다 보니 궁금해져 크리스티안 짐머만,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음반도 구매했다. 전설적 연주자들의 각기 다른 해석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에브게니 키신의 Klang(소리의 울림)의 정교함과 진한 레가토, 빈번함에도 설득력 있고 아름답던 템포 변화와 루바토, 짐머만의 부드럽고도 잘 짜인 설계, 다채로운 데크레센도, 짧은 디미누엔도의 순간조차도 계획된 개연성과 지성,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관조적 여유, 그리고 호로비츠의 다양한 페달링을 이용한 색채의 변화, 베이스와 화성의 견고함과 효과음, 드라마틱한 분위기의 전환.
당시는 어렸기에 정확한 단어로 열거하지 못했지만 이른바 음악의 표정을 느낀 것이다. 얼마나 귀한 깨달음이 있었던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곡을 계속해 연주한다. 매 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 곡은 피아니스트로서 나는 어디쯤에 서있나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동행 중이다. 그리고 한결같이, 이 곡은 어김없이 가을의 소리이다.
“음높이의 미세한 차이나 음의 타이밍의 차이, 혹은 화음의 차이를 ‘듣고 구별하는’ 능력도 피아니스트 쪽이 음악가가 아닌 사람보다 우수하고, 이른바 ‘음의 표정’의 차이를 분간하는 능력도 음악 훈련을 오래 한 사람이 뛰어나다고 한다. 따라서 ‘좋은 귀’를 기르기 위해서는 경험과 훈련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뇌가 유연한’ 시기에 좋은 음악을 많이 들으면 이후의 인생에서 음악을 깊이 즐길 수 있는 ‘일생의 자산’을 갖게 되는 셈이다. “
-<피아니스트의 뇌> 중에서
<들르다>
들러라. 들러야 한다. 연주자의 호흡, 심지어 호흡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동승할 수 있는 곳에 들러라. 양질의 연주회를 만나는 것은 운이 따라야 하는 것이지만 일단 행운을 맞닥뜨리면, 새로운 지경으로 문이 열린다. 이하는 2013년 CD와 DVD로만 접했던 에브게니 키신의 실황 연주를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듣고 흥분에 겨워 행여 잊을까 일기장에 급히 쏟아냈던 기록의 일부분이다.
가감 없는 감정의 폭발인지라, 매우 현장감이 넘쳐 웃음이 새어 나올 수도 있으니 주의할 것.
“슈베르트의 즉흥곡 D.899……!!! 화성이 바뀌며 순차적으로 멜로디가 FED로 흐르는 순간 친구와 기가 막힌 나머지 쳐다보고 눈으로 말했다.. 미쳤어.. 하고.. 슈베르트는 자꾸만 공간이동을 하는 듯했다. 요람에 누운 아이가 엄마의 다독여주는 손길에 잠드는 듯, 아마빛 머리의 소녀가 밀짚모자를 쓰고 금빛 갈대밭에서 바람을 맞는 듯. 얼마 전 이 홀에서의 짐머만의 소리는 뿌옇고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는데, 키신의 울림은 바로 귀 옆에 와서 울렸다. 비밀이 무엇일까?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2악장의 끝 부분에서 연속적 트릴과 동시에 방향을 가지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멜로디가 흘러가는 그 소리는 잊을 수가 없다. 2악장을 듣는 내내 천국에 가있었다. 베토벤의 멜로디가 딱히 대단한 매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그저 소리의 울림에서부터 오는 그 순수한.. 영롱함은.. 베토벤 말년의 속 마음이 들리는 듯했고.. 귀가 들리지 않는 음악가의 마음, 신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마치 현존하지 않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듯한.. 이 울림과 감정은 오로지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인 친구의 말처럼 We are so lucky!! 가히 천국이었다! 불과 어제 친구와 브루크너 교향곡에 대한 대화 중 장조의 밝으면서 따뜻한 곡에서는 매력을 못 느끼겠다고 했는데, 난 오늘 ‘행복한 음악’이 주는 기쁨을 느꼈다!! 음악을 통해 입꼬리가 올라가고 동시에 눈에서는 행복한 눈물이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감정, 정리하지 않고 이 상태로 상상하다가 잠들고 내일, 그 상상을 연주해봐야겠다!”
순도 100%의 격한 전율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 날의 울림에 대한 프리즈 프레임은 장조 곡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 듣는 기쁨도, 연주의 기쁨도 배가 되었다.
청각의 황금시대
고희을 웃도는 연세의 나의 독일 은사님은 스마트폰에서 음원을 검색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으셨다. 당신의 소비에트 공화국 유학 시절엔 악보를 들여다보고, 이 음표들이 실체화되면 어떤 소리일까 며칠이고 상상을 하다가 우연히 그 곡을 들을 수 있는 연주회라도 있으면 악보를 들고 벅찬 마음으로 달려가 한 음을 놓칠세라, 귀 기울이셨다고. 그래서 그 시절 귀한 기회로 들으신 녹음이나 연주회는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고. 우리는 황금시대에 살고 있다. 로마제국의 알렉산더 대왕도 이러한 청각의 호사는 누리지 못했을 터, 우리는 손 안의 세상에 몇 글자만 입력하면 가지각색의 명반을 들을 수 있고, 한국의 크고 작은 홀에서는 매일 뜨거운 연주회가 열린다. 누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에겐 이 시대의 낭만을 만끽하고 향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틀어라, 들어라,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