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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anist Garam Cho Jun 27. 2019

“音美하라“

[  Pianist 조가람의 Classic Essay ]

“어떤 점에서 코르티잔이라는 직업은 인간의 이중적인 가치로부터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코르티잔의 아름다움을 찬양함과 동시에 부정한 여인들로 여겨졌으며 사회는 기독교 윤리와 시민 질서를 내세워서 코르티잔을 응징했다. 하지만 그들이 발산하는 빛은 그러한 이중적 가치에도 흐려지지 않았다. 마치 빛의 강력한 원천을 갖고 있는 듯, 그 빛은 그들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듯했다. 빛은 앎을 의미한다. 무언가에 빛을 비추는 것은 그것을 보는 것뿐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분명 대부분의 코르티잔들은 다른 지성인들의 눈에서 볼 수 있는 총기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대단한 업적을 남겼다. 모가도르는 연기자이자 소설가로 성공했다. 툴리아 다라고나는 철학 논고를 집필했고 베로니카 프랑코는 시인이었다.“

-코르티잔,매혹의 여인들 중 


르네상스 베니스에서부터 20세기 파리에 이르기까지, 그때, 그곳에는 코르티잔이라는 매혹의 여인들이 존재했다. 아름다움이 먹고사는 일인 듯 성실히 아름다웠던 그들은 아름다움을 업으로 삼고 그것도 모자라 세상의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깨닫고 배설했다. 

여성으로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없는 시대, 그곳에서 그들이 낼 수 있는 유일한 소리의 통로는 아름다움이었다. 신에게 부여받아 불가항력으로 그들의 손에, 입술에, 마음에 쥐어진 채 태어난 아름다움은 빛처럼 바깥세상으로 마구 새어 나가 감출 도리가 없었을 터. 빛을 무슨 수로 가둬둘까. 

무겁다 벗으면 업력이 더해져 저 세상에서도 또다시 짐을 짊어진다는  동양의 법문이라도 엿보고 윤회의 사슬이라도 끊으려던 것인지, 운명에 순응함을 넘어, 이왕지사 타고 넘는 대담함 속에 코르티잔은 때로 아름다움을 팔고 그 대가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면서 남자와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여성으로서 유례없는 지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여인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묻어둘 수 없으므로 세상을 향해 방기 할 수밖에 없던 지닌 지성적, 철학적 욕망과 안정적 기반을 위해 이용하는 육체적 아름다움. 목적과 본질 사이의 흐릿한 경계선을 밟고 그들은 영혼의 반은 정부로, 영혼의 반은 예술가로 살았다. 육체적 아름다움을 기회삼아 정신적 아름다움을 세상에 표현할 권리를 얻었기에 세간의 압도적 주목과 대중의 인기를 끌면서도 동시에 뭇 손가락질을 받고, 온전히 그 가치가 인정될 수 없었던 그들의 작품들은 수류운공 (水流雲空)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백 년도, 이 백 년도 전, 그들이 아름다움의 업보를 감당하던 중 떨군 선녀의 옷자락이랄지, 공기 중에 남은 빛의 부산물이랄지, 21세기 아름다운 여성 지성인에 대한 클리셰로 남겨졌다. 



아름다움의 대가


본디 클리셰는 시작과 결과, 인과가 모호하며 때로 전도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시비를 떠나 본능적 관념론으로부터 연유하는데, 어떠한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형성된 일종의 일차적 성질들(primary qualities)이라 할 수 있는 본체에 관한 객관적 관념이, 유사한 대상을 만났을 때 그 성질을 전가시켜 이차적 성질(secondary qualities)을 형성하게 된다. 이차적 성질이 발현될 때는 관습적으로 관 성화된 사고에 의해 무의식이 발현되어 대상을 직관한다. 이는 빠르게 사고할 수 있는 생각의 근육이 되기도, 때로 온건한 통찰력을 잃게 하는 고정관념을 형성하기도 한다. 몇 백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클래식 음악이라는 폐쇄적 보수성안에서 여인이 정숙의 속박을 풀고 아름다움을 방출하려는 자유의 발길질을 할 때, 그리고 그것을 누릴 때, 사회적 시선은 그들을 옛 코르티잔을 바라보던 부정함으로 불식 간에 회귀한다. 그녀들의 미와 지성, 그리고 조소 섞인 사회적 시선은 한 데 혼재되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의식의 착란을 일으키고 귀를 닫게 한다. 그리고 여기 그 의식의 카오스 속에 개의치 않고 당차게 제 길을 걷는 음악가가 있다. 



Khatia Buniatishvili


진행자: Koennen Sie schreiben, lesen und rechnen? (너 쓰고 읽고 계산할 줄 아니?)

전 세계의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을 포함하여 대중까지 클래식의 매력에 끌어들이고 있는 놀라운 흡입력의 조르지아 출신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에게 독일 방송 인터뷰에서 주어진 질문이다. 이 무례, 무지한 질문은 놀랍게도 조르지아의 정치적 상황과 푸틴과의 정치적 관계, 그리고 그 사이 예술가로서 그녀가 서있는 위치와 역할에 대한 질문에 발군의 답변으로 청중의 박수갈채를 이끌어 낸 후 이어졌다. 이러한 우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쓰고 읽고, 계산 못하죠. 중국어로는. 하지만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그루지아어, 러시아어로는 할 수 있답니다.' 무려 5개 국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그녀는 불쾌한 질문에 여유로운 현답으로 우아하게 응대했다. 


'젊은 시절의 아르헤리치를 연상시키는 템퍼라멘트와 테크닉의 소유자'-영국 클래식 FM,

'이 시대 가장 흥분되고 기교적으로 축복받은 젊은 건반주자'-가디언,

두려움 없는 연주, 도발적이고 대담한 해석력-Sony Rable


평만으로도 그 열정과 뜨거움이 느껴지는 그녀의 지성과 연주력은 검증되고 공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장원에서, 그리고 전문 음악인들의 공동체에서 끊임없는 일종의 '덤블론데'의 클리셰로 비난받는다. 그녀가 마치 마릴린 먼로를 연상시키는, 클리셰 덩어리인 육감적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일까, 짙은 립스틱을 바르고 음악과 함께 때로 락스타처럼 곱슬머리를 흩날리기 때문일까.



Blind Test


별천지라 불렸던 베를린 국립 음악대학의 1층 카페테리아. 그곳에서는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어리지 않았던 젊은 음악가들의 음악에 대한 수많은 철학과 번뇌가 벨 에포크 시대 파리의 카페 레 뒤 마고(Les Deux Magots)처럼 분주히 오갔다. 그곳에서 나는 재미있는 실험을 제안했는데 바로 음악가 블라인드 테스트였다. 필자의 관점에서 평소 외모나 국적 때문에 그 음악적 깊이가 평가절하되고 있다고 판단되는 음악가의 연주를 선별하여 음악만 듣고 어떤 연주자의 연주인지 맞추어 보기로 한 것.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가 주빈 메타의 지휘로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콘체르토 1번을 질문으로 내놓자 에밀 길레스, 마르타 아르헤리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등의 그야말로 거장의 이름이 앞다투어 쏟아졌고, 그들의 연주보다 더 깊이 있고 학구적이라는 관점이 제시되자 '냉철한 이성의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를 가진 니콜라이 루간스키로 의견이 모아졌다.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의 연주였다는 사실을 밝히자 탄성이 나왔다. ' 그 연주가 그녀의 것이라고?!'"Kann nicht sein!(있을 수 없는 일이야!""앞으로는 그녀를 예쁜 여인이 아닌 음악가로 보겠어"등의 충격의 반응들. 




세상에 풀어놓는 그녀의 음악에 압도당하던 세상은 불현 돌아서서 그녀의 육체와 음악적 해석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며 힐난한다. 이것은 양날의 검이 된다. 알아주는 이가 있든지 없든지 그녀의 숨겨지지도, 그리고 인위적으로 숨기지도 않는 육체적 아름다움은 그녀를 뜨거운 감자로 만들고 그녀가 지닌 압도적 연주력이 뛰놀 장을 만들어 주는데 분명 일조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성의 여부나 그녀가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획득되는 스타성이 그녀의 지성과 음악적 깊이에 대한 의혹으로 부정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보수의 반석 위에 쌓아 올린 클래식 음악의 역사는 모차르트의 개혁성에도, 라흐마니노프의 전위성에도 반기를 들며 요동한 이력이 있으니 하물며 연주력에 대한 편견에 괴념치 않는 그녀. 여전히 빛나는 머릿결을 찰랑이고 때로 아름다운 몸매가 드러나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때로 세간의 평을 조롱하는 듯, 조르드 상드를 연상케 하는 매니쉬 한 수트를 입는 그녀가 주저 없이 발산하는 매력은 더욱이 커다란 파란을 불거지게 하지 않겠는가. 한 인터뷰어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인터뷰어: 무대에서 섹슈얼한 매력을 어필하고 싶은가, 립스틱과 드레스는 그 노력과 의도의 일환인가?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 나는 무대 위에서 나로서 존재한다. 당신을 만날 때 립스틱을 발랐다면 연주에서도 립스틱을 바른다. 모든 것은 나의 음악을 향한다.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라는 이름은 기억하기 힘들어 국제 시장에 맞지 않으므로 보다 대중적인 가명을 사용하자는 소속사의 제안에 조르지아어 고유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그녀의 지극하고 깊은 면면.


화려함의 눈부심에 가리어진 세밀함, 아름다움이라는 강렬한 일차적 자극 아래 묻힌 지성. 그리고 모두가 알지 못할지라도 지성의 자유를 위해, 그리고 가장 본인의 본연으로 존재하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는, 아상(我相)을 훼손하는 굴복을 범치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는 무대.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Kein Regel wollte da passen und war doch kein Fehler drin.

어떠한 원칙도 거기에 맞지 않을 것이며, 그럼에도 거기에 어떠한 잘못도 없었다. "


이 시대의 음악가여, 승패와 옳고 그름의 숭고한 클래식의 바다에서, 침몰되지 말고 자아의 돛을 달고 항해하라. 

그리고 음악을 듣고 연주를 보는 당신, 관성적으로 눈과 귀에 덧씌워진 클리셰를 걷어내고 오늘, 아름다운 그녀들의 음악을 音美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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