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조가람의 클래식 에세이
20세의 프레데릭 쇼팽이 더 큰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던 1830년, 바르샤바는 폭풍 전야였다. 폴란드는 자유를 향한 청년들의 흥분이 고조되고 있었다.
고국을 떠나기 전 날, 송별회에서 그의 친구들의 송별의 말과 함께 폴란드의 흙은 은배에 담아 전했다.
‘부디 운명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던, 조국에 대한 사랑을 잃지 말기를, 폴란드와 당신을 민족의 자랑으로 생각하는 많은 이들을 기억하기를 바라네.'
빈에 도착한 지 일주일 뒤, 바르샤바에는 혁명이 시작되었다. 참전하여 러시아군과 직접 싸우겠다고 집으로 편지를 보내자 아버지 니콜라스는 이렇게 답을 한다.
‘예술로 총검을 잡으라.'
빈에서 만난 폴란드 시인 비트비키 또한 그의 어깨에 예술의 총검을 얹는다.
‘ 당신이 폴란드 국민이라는 걸 잊지 말아주십시오. 자기 나라에 고유한 풍토가 있는 것처럼 고유한 가락도 있습니다. 모방은 다른 범용한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당신은 고유한 폴란드의 가락을 당신의 재능을 독창적으로 나타내주십시오. 당신이 고국을 떠난 것은 당신의 예술을 완성함으로써 조국에게 영광을 가져오게 하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후 폴란드는 그에게 소명이 된다.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는 장식적이고 효과주의적이었다. 고전주의의 형식에 입각하여 ‘취향'으로 연주자의 차별화를 꾀하던 때를 지나, ‘개성'이 주된 화두로 떠올랐다. 음악에는 표제가 붙어야 했고 요란하고 극적인 서사를 화려한 기교와 즉흥성으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다. 롤랑 마누엘의 표현에 따르면 ‘이미 성충이 누에고치를 떠나듯이 스무 살에 자신의 매력과 무기를 온전히 다 갖추고서 친숙한 고향 땅을 영원히 떠난‘ 쇼팽은 대세의 흐름을 따를 의향이 없었다. 책상 위에 늘 바흐의 악보를 올려두고 고전적 음악적 견해를 견지하며 자신만의 낭만파적 상상력을 만들어나갔다. 자신의 작품에 그 어떠한 낭만적 수식어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의 장르를 군더더기없이 ‘연습곡, 전주곡,야상곡,발라드,폴로네이즈 '등으로 분류했다.
폴란드어에 잘(Zal) 이라는 단어가 있다. 아픔과 슬픔, 후회 그리고 분노가 어울어진 뜻이다. 이 번역하기 힘든 단어를 아마 한민족, 우리는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한(恨)이다. 쇼팽 음악의 변치 않는 중심이 된 zal은 ’폴란드 민속 음악‘으로 드러났다. ’천성'처럼 되어버린,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을 고향의 가락말이다. 그것이 본질적이든 암묵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종의 인간문화재처럼 그의 음악에는 민족적 사명감이 버무러져 있다.
당대에 역시 이러한 사명감으로 활동하던 폴란드 민중 작가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쇼팽에게 강렬한 영감을 주었다. 쇼팽은 그의 투쟁적 작품에 기인하여 발라드 4곡을 완성한다.
Ballade No.1 in G minor, Op.23
‘애국을 위한 반역’을 뜻하는 ‘윌렌로디즘’이라는 개념을 탄생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시 ‘콘라드 윌렌로드’로부터 영감을 받아 1835년 작곡되었다. 14세기, 리투아니아의 어린 왕자 콘라드 윌렌로드가 적십자군에게 패하여 나라를 잃고, 적십자군 수령의 아들이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적십자군의 수령이 된 윌렌로드는 리투아니아와 밀통하여 조국의 독립을 돕고, 자신은 적십자군의 배반자로 처형을 당한다. 쇼팽의 발라드 1번 작품은 서사의 묘사라기보다 들끓는 마음으로 예술의 총검을 든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윌렌로디즘’에 대한 투영이라고 볼 수 있다.
Ballade No.2 in F Major, Op.38
로베르트 슈만이 ‘크라이슬레리아나'를 쇼팽에게 헌정한 보답으로 그에게 헌정되었다. ’나는 언제나 실체와 그림자 사이에 끼어있다.‘고 말한 슈만의 말이 떠오르는 이 곡은 시 ’윌리스의 호수'의 심상으로부터 기인한다. 러시아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여인들의 기도는 호숫가의 꽃에 독을 품게 한다. 미츠키에비치의 꽃과 독, 슈만의 오이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 그리고 쇼팽 발라드 2번의 평온한 안단티노와 휘몰아치는 프레스토 콘 푸오코는 맞닿아있다.
Ballade No.3 in A flat Major, Op.47
‘모든 것은 몸짓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쇼팽이 이 곡이 작곡된 1841년 조르드 상드에게 한 말이다. 삼박자의 작은 일렁임의 춤을 추게 되는 이 곡은 미츠키에비치의 시 ‘물의 요정'에서 탄생했다. 물의 요정으로 모습을 바꾼 젊은 여인들은 남자들을 유혹하여 환상을 쫓게 만든다. 그리고 남자들은 파멸에 이른다. 조국에 대한 예술의 얼이 여인의 몸짓이고, 러시아 제국이 파멸하는 남자들이라면 과장된 해석일지.
Ballade No.4 in F minor, Op.52
1842년,작곡 과정은 인고 그 자체였다. 조르드 상드는 그 과정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의 창작은 경탄스럽다. 주제의 세부를 세우는 데에 그는 초조해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롭게 시도한다. 대략적 구도가 잡히면 그는 그것을 무척 상세히 분석하는데, 이 때 그는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주 깊은 우울에 빠진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펜을 집어던진다. 다음 날이면 괴로움에 가득 차서 이것을 반복한다. 한 박자를 몇 백 번이나 고쳐 쓰고 지운다.’
그는 시 ‘버드리의 세 형제'에서 출발한 상념을 억겁의 과정을 통해 발라드 4번에 담아냈다. 약탈당한 황폐한 땅으로부터 신부를 데리고 돌아오는 세 형제들의 승리는 폴란드의 러시아로부터의 온전한 독립의 날에 대한 염원으로 환원되었다.
쇼팽은 고국을 떠난지 약 20년 후, 1849년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친구들은 폴란드의 흙을 담은 배를 그의 관위에 뿌려 함께 묻어주었고, 그의 심장은 황금 항아리에 담겨 바르샤바의 교회에 안치되었다. 평생을 고독한 망명자로 살면서도 코스모폴리탄이 되려하지 않고 폴란드인답게 보이려고, 폴란드의 독수리 마크가 붙은 커프스단추를 달고 의용군의 마크를 수놓은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던 그이다.
그는 사망 1년 전 이렇게 말했다.
‘폴란드에서 부르던 노래가 생각이 나지 않아. 내 예술은 어디로 도망쳤을까. 내 가슴은 어디에 다 소모되었을까.‘
어쩌면 그는 참으로 조국의 노래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모두 소모되자 그의 영혼은 소명을 마쳤기에, 이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