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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May 17. 2020

우리에게도 잠시 기대어 쉴 바람이 필요하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2016)

Dear. 코로나19로 힘들어하고 있는 우리에게


 <응답하라 1994>에서 IMF 사태로 합격한 직장에서 무기한 대기 통보를 받은 윤진이의 모습을 볼 때도, 심야 극장에서 홀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국가부도의 날>을 감상했을 때도, 그런 일이 나에게 닥치리란 예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강남에서 학원을 운영하시는 아버지는 등교가 연기되는 바람에 아이들의 발길이 끊겨 투잡, 쓰리잡을 뛰고 계십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힘들어하는 모습에 엄마는 항상 생활비가 들어오면 고기부터 사들이십니다. 저는 한 글자당 평균 3원밖에 안 하는 글로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을 벌며 날이 저물면 하루빨리 행복했던 나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기도하며 잠듭니다.


 인텔리 교육 과정을 밟은 학원 원장, 영어 교사인 부모님이 이력서를 쓸 때나 정부 지원금을 신청할 때 헤매는 모습을 보며 코로나라는 게 뭔데 이렇게 우리를 힘들게 만드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리고 괜스레 옛날에 봤던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2016)


 켄 로치 감독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외면하는 노동 계급의 사회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따스한 햇살을 비춰줍니다. 제69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 역시 블루 칼라의 애환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 할아버지,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병으로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당을 받기 위해 찾은 관공서에서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케이티'와 만나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이 생계를 이어나가려는 노력과 수당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영화의 주된 내용입니다.


'블루 칼라의 시인'이란 별명을 가진 감독이 관료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이하 이미지 출처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 2016)


 작품은 주인공 다니엘 할아버지의 퉁명스러운 말투와 따수운 속내를 닮은 듯, 객관적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서술합니다. 컷과 컷 사이를 메우는 건 몇 초간의 정적과 검은 화면뿐, 화려한 편집술은 찾아볼 수 없죠. 생활고에 시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릴 때도 신파적 요소 없이 사실만을 그립니다. 이렇게 툭툭 던지는 듯한 문법으로 쓰인 영화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는 건 이웃사촌 사이에 싹튼 인간애와 모순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 아닐까요?


 다니엘과 케이티, 이 둘 모두 편하게 먹고살기 위해 수당을 원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성실히 세금을 납부하고 국민의 의무를 다 했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돌아오는 건 형식적인 절차와 고된 기다림입니다. 심장병으로 쓰러져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전화 질의응답으로 '노동 가능' 판정을 내려 버리거나,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버스를 잘못 타 상담 시간에 몇 분 늦었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하는 등 상식 밖의 '절차' 때문에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권리를 누리지도 못한 채, 복지사각지대에서 맴돌게 됩니다.


 둘의 이야기가 영화화된 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지극히 당연한 우리네 이웃 이야기지만, 이렇게라도 주의를 끌지 않으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켄 로치 감독은 사실적이고도 잔인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영화 기술을 빌려 포장하려 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며 시선이 오롯이 다니엘과 케이티에게 쏟아지도록 유도하고 있죠. 코로나로 인해 오늘도 많은 이들이 줄어든 일감, 떨어진 매출, 사라진 일자리에 좌절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여유가 있다고 해서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지속되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감독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엄청난 금액이나 아주 특별한 지원이 없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서로를 보듬어 주던 주인공처럼, 작은 관심과 말 한마디가 큰 힘을 준다는 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메세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에게도 잠시 기대어 쉴 바람이 필요하지"

조건 없는 인간애


관료주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


 영화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건 서류와 절차를 들먹이는 인간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일처리입니다. '레드 테이프'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신가요? 관청식의 번거로운 형식주의/문서주의를 꼬집는 용어인데요, 작품 속에 그 모습이 잘 녹아있습니다. 컴퓨터라곤 만져본 적 없는 다니엘이 수당 신청을 위해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건 최소한의 도움입니다. 그를 도와주는 직원을 발견한 상사는 '잘못된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고 말하며 나무랍니다. '공짜로 돈 받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말하는 듯한 위압적인 일자리 알선 직원의 눈빛이나 사정도 듣지 않고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내쫓는 태도 모두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합니다.


반면, 다니엘과 그의 이웃들은 조건 없는 인간애를 베풀며 산다


 반면 다니엘은 틱틱거려도 옆집 청년의 택배를 대신 받아주고, 전공을 살려 케이티의 집을 고쳐주고, 무료 배식소에서 자기 몫을 양보하는 인간미 넘치는 할아버지입니다. 옆집 청년들은 몇 분 만에 다니엘의 수당 신청서를 작성해 프린트해주고, 케이티는 식사를 대접하는 등, 도움을 받은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성의를 표하며 이웃 간의 정을 키워갑니다. 정식 절차를 밟아야만 최소한의 도움을 주는 관공서 직원들의 모습과 대비를 이룹니다.



 우연히 만난 두 이웃사촌의 연대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더욱 끈끈해져 갑니다. 어느 밤, 가정을 지키려다 지친 케이티에게 다니엘은 "우리에게도 잠시 기대어 쉴 바람이 필요하지."라고 위로해줍니다. 그 말을 듣자 이전 날의 고통을 이해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눈시울을 붉히는 케이티. 그녀에게 잠시 기대어 쉴 바람이란 다니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생리대 살 돈이 없어 비참한 감정에 휩싸여도, 사람들 앞에서 통조림을 따 먹을 정도로 굶주려도 곁에서 지켜준 건 정 많은 이웃사촌 다니엘이었기 때문이죠. 정작 본인은 수당 지급을 거절 당해 모든 걸 팔 지언정, 인간의 정을 져버리지 않은 다니엘의 모습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나는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웃을 향한 다니엘의 따뜻한 마음은 수당을 받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건강이 더 나빠지고 살림살이를 다 팔 정도로 가계가 기울어도 여전히 서류 운운하는 관공서를 향해 다니엘은 절규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아무리 인간답게 도와달라고 외칠 땐 쳐다보지도 않던 직원들도 다니엘의 마지막 외침을 듣고서는 밖으로 달려 나옵니다. 도와주려고 한 건 아니고, 공공시설을 파손한 그를 신고하기 위해서였지만 메세지는 어느 정도 통한 것 같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질병 수당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서게 됩니다. 판결이 끝난 후 사람들 앞에서 낭독할 편지도 준비했지만 그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길고 긴 싸움에 지쳐서 일까요, 아니면 원하는 바가 눈앞에 다가오자 여한이 없어져서 일까요, 다니엘은 재판에 들어가기 전 영영 눈을 감고 맙니다. 그리고 그의 품 속에 있던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등록 번호도, 컴퓨터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굽실거리지 않았으며 성실히 일하였고
자선에 기대지도, 그에 빌어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언제든 도왔습니다.
나는 개가 아닌 사람입니다.
나는 단지 인간으로서 존중만을 바랐을 뿐입니다.
나는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Dear all,


 혹시 지금 힘든 시간을 걷고 있다면 감히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잘못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라고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져버리지 말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향해 걸어가길 바랍니다. 저도 그럴 거고요.


 <영화로 쓰는 편지> 도입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 작품이란 단독으로 존재할 때 빛나기보다, 관객의 삶 속으로 들어와 모자란 부분을 채워 주고 상처를 치유할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합니다.'라고요. 오늘 소개해드린 영화도 오늘날 우리의 삶에 들어와 잠시 기대어 쉴 바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끝마칩니다. 함께 위로받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From.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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