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레스트 검프> (로버트 저메키스, 1994)
To. 내 앞에 놓인 운명이 버겁게만 느껴지는 이들을 위해
제가 영화를 보며 가장 놀랄 때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을 볼 때입니다. 격동의 세월을 버티는 이가 있는 한편,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인내해야만 하는 이도, 누구의 도움 없이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제가 안고 있는 고민은 티끌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들 앞에 주어진 문제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 같습니다. 서로 다른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주인공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을 찾자면 묵묵히 자기 갈 길을 걸어간다는 점입니다.
남편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그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짓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퍼스트레이디, 재클린 케네디의 모습을 담은 <재키> (파블로 라라인, 2016). 가정의 평화가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지만 그저 담담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중년 여인의 모습을 좇는 <다가오는 것들> (미아-한센 러브, 2016). 사랑하는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인류 최초 달에 착륙하기 위한 한 남자의 고독한 도전을 담은 <퍼스트 맨> (데미언 셔젤, 2018). 여기 나열한 작품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영화들이 각자의 용기를 갖고 살아가는 이들의 조용한 도전을 응시합니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고요히 자기 앞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일은 매우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외도 견뎌낼 힘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건 무덤덤하게 운명을,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죠.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말하듯이 인생은 복불복 초콜릿 박스와도 같습니다. 형형색색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그 안에 달콤한 크림이 들어있을지, 씁쓰레한 럼주가 들어있을지, 톡 쏘는 고추냉이가 들어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아무런 경고 없이 입 안 가득 퍼지는 맛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으신가요?
영화 <포레스트 검프> (로버트 제메키스, 1994)
미국 근현대를 살아온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포레스트 검프>. 이 작품 전체를 관철하는 주제를 고르라면 누구나 다음 명대사를 떠올릴 겁니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야. 네가 무엇을 고를지 아무도 모른단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장르가 드라마인지, 전쟁인지, 코미디인지, 역사물인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즉, 포레스트의 인생도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사건이 교차된 씁쓸 달콤 짜릿한 초콜릿 박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모자란 지능, 불편한 다리, 전쟁, 전후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 그리고 그 안에서 겪어야만 하는 만남과 이별... 충격에 대한 탄력 회복성이 낮은 저는 포레스트가 겪어야 했던 사건들 중 그 어떤 하나도 제대로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너무 많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서 일까요? 사소한 불운에도 금세 좌절하며 누군가 끄집어내 주기 전 까지는 혼자만의 방에 박혀 숨어 지내기에 급급합니다. 할머니는 언젠가 힘들어 울고 있는 제게 '우리 손녀는 언제쯤 평온해질 수 있을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썩 나쁘지만은 않은 초콜릿 상자를 갖고 태어났지만 꽝이 계속해서 나올 때는 저도 모르게 풀이 죽어버립니다.
풀이 죽어버리는 건 제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때문입니다. 세 시간 넘게 서서 통근하는 탓에 무릎이 아작나야만 하는 사소한 운명에서부터 여기서 말할 수 없지만 짊어지고 가야 할 큰 운명까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보다 정해진 운명을 따라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을까요?
'아모르 파티 Amor fati'-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피치 못할 일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법을 자꾸자꾸 배우고 싶다.
그럼 나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니체가 말하는 '피치 못할 일'이란 우리 손으로 결정할 수 없는 '운명'을 뜻합니다. 그리고 운명을 아름답게 받아들이고, 버티는 경지를 넘어 즐기라고 하죠. 제가 다른 글에서 언급했듯이 '존버'만이 삶을 사는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존버는 상처를 곪게 만들어 나를 죽이는 삶의 태도 중 하나입니다.
편지 초두에서 말한 주인공들이나 포레스트는 삶을 버티지 않습니다. 운명을 살아가려고 할 뿐이죠.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진 않더라도 그들은 그저 주어진 운명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묵묵히 수행합니다. 포레스트에게 있어 그 도구는 달리기였습니다. 달리기를 하며 많은 생각을 하진 않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대해 불평하거나 어떠한 판단을 내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리며 본인에게 주어진 일을 해결하는데 집중하죠.
피치 못할 전쟁, 이별, 신체적 조건...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달리는 포레스트의 태도였습니다. 어떠한 혼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뚝딱뚝딱 과제를 해결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동시에, 포레스트를 응원하고 우리의 태도를 되짚어보게 만들어줍니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사, "Run Forrest, run!". 어릴 때는 그저 웃기게만 들렸던 대사이지만, 포레스트처럼 용기 있게 운명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던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외침이자 포레스트가 주도적으로 운명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대사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 말을 듣고 또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보고 달리는 우직한 포레스트의 모습에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개봉한 지 30년 가까이 된 영화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작품에 담긴 응원의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요? 인생은 어떤 맛이 나올지 모르는 복불복 초콜릿 상자와도 같지만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주제를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포레스트의 모습을 빌려 말하는데, 그 어떤 이가 미소를 띠지 않지 않겠습니까. 하루의 시작이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월화수목금토일 어떤 맛의 초콜릿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너무 힘들어 말고 이 영화를 보며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From. 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