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3. 파레토의 법칙
파레토의 법칙
마케터라면 ‘파레토의 법칙’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19세기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만든 법칙으로 상위 20%의 인구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한다는 의미. 마케팅 분야에서는 상위 20% 상품이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한다는 뜻으로, 매출 극대화를 위해서는 잘 팔리는 상품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상위 20%에 해당하는 탑티어만이 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1등만 기억하는 이 각박한 세태에 딱 어울리는 법칙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걸 우리네 직장에 적용해봐도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기획과 의사결정, 스케줄 조정 등 소위 빅 픽처를 그리는 사람은 조직 내 소수인원 = 핵심인재로 나머지는 큰 그림 실행을 위한 직원 1, 직원 2, 혹은 인턴 9에 불과하죠.
우리 회사원이 일을 할 시간에 회사는 누구를 자를까 항상 고민하고 있다는데 혹시 그게 나는 아닐까 싶어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갑니다. 혹은 내가 드라마 <또 오해영> (tvN, 2016) 속 되지도 않을 밥 프로젝트에 매달리며 성과는 없는 오해영 대리가 된 건 아닌가 싶어 매일 ‘과연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는 일일까?’라며 자기 검열을 하곤 합니다. 어느 아침애는 동료들과 수다를 떨다가 문득 '우리는 언제 폐기 되지 모르는 편의점 우유 같은 존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어 퍽 무서워졌습니다.
이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T자형 인재’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나의 존재가치를 지지하는 튼튼한 기둥 = 온리 원 스킬과 그 옆에 매달린 무수한 잔재능이 있어야만 누구 하나 끽소리 못하는 겁니다. 카피라이터를 꿈꾸는 디지털 광고 대행사 AE로 커리어를 시작해 마케팅팀 소속인 듯 마케팅팀 소속 아닌 기획자로 밥벌이를 하는 지금까지 직무정체성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 중입니다.
완벽한 정의는 모르겠지만 굳이 적어보자면 카피라이팅과 콘텐츠 기획이 저의 기둥이고, 프로모션 기획, 운영, 배너 기획, 바이럴 원고 작성 등이 저의 마케터로서의 몸값을 높여주는 나머지 스킬이 되겠죠. 비슷한 고민을 하는 신입~주니어 마케터 분들이 많으신지 콘텐츠 마케터 대나무숲과 단톡방에는 ‘마케터가 이런 일도 하나요?’라는 류의 질문이 하루에 몇 개 꼴로 올라옵니다. 기획자는 제작을 하고 제작자는 광고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인턴이 쇼핑몰 운영과 CS를 하는 게 우당탕탕 우리네 마케터의 일상이랍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콧대만 높던 완전신입 시절에는 왜 콘텐츠 기획자가 촬영 현장까지 따라가야 하는지, 소셜 운영 리포트를 작성해야 하는지, 월간 아이템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찍히기 싫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하긴 했지만 왜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일을 하니 결과도 딱히 좋지 않았던 듯합니다. 아주 작은 업무를 이해해야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는 거고, 프로젝트 완수로 시야를 넓히며 더 많은 프로젝트를 맡고 그제야 팀을 맡을 능력이 생기는 건데 누구나 처음에는 다 건너뛰고 싶어 합니다. 과정이 결코 녹록지 않기 때문이죠.
역 파레토의 법칙
지금이야 업무에 관한 빅 픽처와 넓은 이해 = 업무 능력이라는 걸 깨달아서 하기 싫은 일을 받아도 속으로 ‘가보자고~’를 외치곤 하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직무 관련 자격증 공부를 하고 강의를 듣고 마케터 인스타그램 계정을 들락날락하곤 합니다. 물론 그 스킬들 다 익혀서 제가 직접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개발할 건 아니지만 스킬 하나하나가 명확한 커뮤니케이션과 원활한 일처리를 위한 것이니 무엇 하나 버릴 게 없습니다.
앞서 소개한 파레토의 법칙과 완전히 반대되는 ‘역 파레토의 법칙’ (aka 롱테일 법칙)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파레토의 법칙에서 하위 80%에 해당하는 비인기 상품을 긴 꼬리 (롱테일)에 비유한 용어로 주목받지 못하는 다수가 핵심적인 소수보다 더 큰 가치를 창출하는 현상. 온라인 서점 아마존 등장 이후 오프라인 서점에 진열되지 못해 외면받았던 비인기 도서가 아마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 것이 시초다.
상위 20% 못지않게 나머지 80%도 중요하다는 뜻인데요, 각자의 직무 능력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롱테일의 중요성을 모르던 시절에는 ‘이거 제가 왜 해요?’하며 눈에 쌍심지를 켰지만 결국에는 다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입니다. 일을 시키는 것도 능력으로 얼마나 걸리는지, 맨파워는 얼마나 필요한지, 꼭 필요한 일인지, 아니 애초에 가능한 일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롱테일의 파워가 필요합니다. 1등에게만 박수쳐주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1에서 100까지 신경써야 한다니 조금은 피곤해지지만 기획만 하는 바보라서 제작 일정이니 광고 비용이니 이런 거 모른다는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다른 일을 벌여야 합니다.
이렇게 써 놓고도 출근하면 생각 없이 짬 때리는 사람들과 기획과 관련 없는 업무 요청에 환멸을 느낄 겁니다. 나 빼고 한가한 동료들을 보면 이 회사 일은 나랑 내 팀이 다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다른 부서 일인데도 저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던지는 걸 보면 열이 오르지만 결국에는 내가 믿을 만한 키-퍼-슨 (key person)이라 그런 거니까 너무 스트레스받지 맙시다. 대신 객관적인 눈으로 빅 픽처를 그리는 연습과 누구 하나 거슬리지 않는 프로젝트 플랜을 짜보며 꾹 참고 8시간을 버텨봅니다. 성실한 우리가 해낸 것들은 언젠가 꼭 빛을 볼 날이 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