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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Sep 12. 2022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EP02. 자아비판 금지

나 빼고 다 폐급



 직장 내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K-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SNS에 돌아다니는 밈으로 접해보셨을 테지요. 대충 요약하자면 ‘이 조직을 가나 저 조직을 가나 또라이는 항상 존재한다’는 유사 과학 비슷한 거랄까요.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 네 번의 이직을 경험하며 겪어온 또라이의 숫자도 어마어마합니다. ‘-님’자 호칭도 아까운 사람들 중 일부를 나열해보자면 입사 100일도 안 된 저한테 일 못한다고 소리소리 지르던 첫 팀장, 성희롱과 가스라이팅이 일상이던 대표, 야근이 승진이 척도라던 부장 정도입니다.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게 된 이후 가장 괴로웠던 건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학창 시절처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떻게 저런 또라이들과 하루 8시간 동안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고 가끔 회식을 하고 퇴근길 말동무가 되어주어야 하는지, 그게 참 힘들었었습니다. 다행히 나이가 들수록 수치심과 낯가림은 사라져 소위 말하는 “사회생활”이 예전처럼 힘들진 않습니다. 오히려 제일 힘든 건 일 못하는 또라이들을 상대하는 거라는 걸 깨달은 뒤로는 나 홀로 속쓰림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다채로운 또라이의 세계



01.  응~ 파워포인트로도 만들겠다


 오래된 트윗이긴 하지만 오늘 이야기에 이 짤을 빠뜨리면 서운하죠.



 콘텐츠 기획자로 일하며 디자이너에게 찾아가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개떡 같은 기획안을 보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기깔나게 뽑아내는 디자이너를 만나면 어화둥둥 떠받들고 싶을 정도로 디자인 피드백은 업무 스트레스의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제작자에게 최악의 욕은 ‘파워포인트로 만든 것 같다’인데 얼굴에 대고 이 말을 하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또라이로 찍혀 인사팀 면담이 잡힐 게 뻔하니 참고 참으며 피드백 파일을 만들어 보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PPT를 PSD로 변환한 듯한 몇몇 디자인 시안이 눈앞에 선합니다. 오죽하면 우울할 때 보려고 핸드폰 사진첩에 저장해놨겠습니까.




02.  모든 게 엉망진창인데 니가 제일 문제야


 광고 회사의 주축은 AE (Account Executive), 즉 기획자라고 할 정도로 AE의 업무는 다채롭습니다. 회사 바이 회사지만 스케줄 조정, 비용 처리, 보고서 작성, 내외부 커뮤니케이션은 기본이요, 일이 어그러졌을 때 팀장님, 대표님, 협력사, 광고주 욕받이 역할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뭐라도 하나 해결을 해야 마음 놓고 기획을 하든 다른 업무를 보든 할 텐데 지급요청일을 명시했는데도 까먹어서 다시 메신저를 보내야 할 때나 검수할 시간은 생각 안 하고 마감일 퇴근 직전에 파일을 넘겨받을 때나 문서 능력은 1도 찾아볼 수 없는 협력 문서를 전달받을 때면 단전에부터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웃긴 건 이벤트 시안이 별로인 것도, 옆 부서에서 파일을 늦게 주는 것도, 하물며 신입이 10일 만에 빤쓰런 치는 것도 모두 기획 탓으로 돌리는 회사 덕분에 안정액을 먹어야 할 정도로 화병이 심해졌습니다.


 

가끔 저와 일하는 사람들은 제게 왜 항상 화가 나 있냐고 물어보지만 차마 ‘니가 일을 X같이 해서요’라고 못하고 눈웃음 한 번 지어주고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이럴 때 끄덕거려줄 마음 맞는 동료 하나쯤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03.  유교 꼰대 건들지 말어라


 요즘 기업들 ‘수평 호칭제’ 좋아하시죠. 개념이 박힌 사람이라면 수평 호칭제 속에서도 연차에 따라 대우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터. 가끔가다 회사에서 나이 같고 직급 같다고 (혹은 업무가 다르다고) 기어오르는 신입도 보입니다. 그런 거에 속 썩기에는 이미 업무 스트레스로 위에 빵꾸나기 일보직전이라 조용히 지켜보다가 팀장님에게 보고합니다. 뒷일은 본인이 알아서 책임지는 겁니다.


 이게 회사인지 유치원인지 모를 정도로 분위기 개판 오 분 전인 회사도 있지만 같은 눈높이에서 맞받아 치는 건 하수. 어차피 낭중지추라고 자기 일 묵묵히 하고 능력 있는 사람은 눈에 띄기 마련입니다. 그저 기질의 차이겠거니 하고 웃어넘기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합니다. 말이 쉽지, 그런 일들 웃어 넘기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이들의 귀여운 실수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겁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개새끼일 수 있다



 ‘저런 팀이랑 일하면 정말 회사 바닥도 핥을 수 있겠다’라는 제 오피스 라이프의 로망을 실현한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tvN, 2019) 3화 중 대표 ‘브라이언’과 TF팀 팀장 ‘타미’의 대화가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우린 평생 누군가의 어린 후배이자 어려운 선배이자 이해할 수 없는 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타미: 어릴 때요 38살 정도만 먹으면 완벽한 어른이 될 줄 알았어요. 모든 일에 정답을 알고 옳은 결정만 하는 어른이요. 근데 38이 되고 뭘 깨달은 줄 아세요? 결정이 옳았다 해도 결과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거. 그런 것만 깨닫고 있어요.
브라이언: 48 정도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아, 이거 스포일런데. 옳은 건 뭐고 틀린 건 뭘까? 나한테 옳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옳은 것일까. 나한테 틀린다고 해서 다른 사람한테도 틀리는 걸까. 내가 옳은 방향으로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해도 한 가지는 기억하자.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 수 있다
타미: 너무 큰 스포라 뛰어내리고 싶네요.






 한 팀장님이 저에게 했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근데 가람아, 요즘 신입들이 다 너처럼 일 잘하는 데 목숨 걸지 않아.”였습니다. 그동안 일 잘하는 것, 나이와 직급에 맞는 대우를 하며 예의 있게 행동하는 Humble & Kindness를 신념으로 삼고 살아왔습니다만 그게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나도 내가 그렇게 욕하던 또라이 꼰대가 되었구나!'하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래도 전 만만한 非또라이가 될 바에 또라이 중의 또라이, 상도라이로 불리는 것이 좋습니다. 가끔 기획자 단톡방에 ‘일 잘하는 또라이 vs 폐급 천사’ 이런 밸런스 게임이 올라오는데 전자를 택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저도 가끔은 정신줄 놓고 남들처럼 일해볼까 하는 충동에 휩싸이지만 그러기엔 제가 쌓아온 노력이 너무 아까우니까. 남 일에 신경 쓸 시간에 자격증이나 하나 더 따서 직무 능력 향상에 힘쓰기로 합니다. 물론, 공부는 업무 외 시간에 합니다. 또라이라도 말은 잘 들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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