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4. 직무와 직책, 주니어와 시니어
직급이란 무엇일까요. 전통적으로 사원-주임-대리-과장-차장-부장-팀장 순으로 올라가며 요즘은 회사 성격이나 규모에 맞게 선임, 책임, 셀장, 파트장, 매니저, 프로 등 아주 다양한 자리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전통적 직급에 해당하는 명칭의 한자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각각의 역할이 무엇인지 ‘오호라’하고 고개가 끄덕여집니다만 우리 주변의 몇몇 ‘직급님’들을 보니 직급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조직 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인지, 수행하는 이들은 드뭅니다.
이런 현상은 절대적인 직급과 상대적인 직책, 즉 직급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 사이에 어마어마한 괴리로 인해 생겨납니다.
직급:
직무의 등급. 일의 종류나 난이도, 책임도 따위가 상당히 비슷한 직위를 한데 묶은 최하위의 구분.
직책:
직급이 회사 내 직위의 등급 자체를 이르는 말이라면, 직책은 이에 해당하는 책임 및 업무를 의미함.
신입은 ‘내가 신입이니까 열심히 해야지!’ 이런 열정 뿜뿜 마인드, 선임은 ‘내가 더 많이 버니까 책임 지고 일해야지’라는 믿음직 마인드로 일을 해야 하는데 어째 패치가 잘못되어 ‘신입 = 아 몰라, 배 째’ ‘선임 = 알아서 해보고 가져와’ 마인드로 변질되었습니다.
양쪽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신입 입장에서는 최저 임금 받으면서 꼰대들 사이에서 일 배우고 깨지고 눈치 보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잡일까지 알아서 하라고 하는 선임들이 얼마나 꼴 보기 싫겠습니까. 선임들도 뭐 천성이 못 돼먹은 부류도 있지만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제는 일도 그렇게 어렵지 않고 슬슬 요행도 부리고 싶어질 겁니다. 저도 솔직히 얘기하면 SNS 멘션 정도는 후배들이 써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리고 그 남은 뇌 용량을 프로젝트 기획이나 팀 매니징에 쓰고 싶지만 직급도, 매니징 할 후임도 없으니 닥치고 제가 다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이유로 힘든 직장에서 그래도 더 힘든 건 신입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업무 배우는 것도 벅차 죽겠는데 끼니 때는 숟가락 물잔 세팅을 해야 하고 쓰레기통이 꽉 차 있으면 괜히 눈치가 보이고 우편물이 오면 한달음에 나가야 했던 신입 시절의 저는 불쌍하리만치 쭈글이였습니다. 한 발 앞서 방향성을 제시하고 일이 잘못 돌아가면 욕받이 역할을 하는 지금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지만 저의 경우 신입 때 받던 스트레스보다는 버틸만합니다. (아직까지는)
다음 주는 어떤 실수를 저지를까, 어떤 새로운 일을 또 맡게 될까, 팀장님이 나한테 또 소리 지르지 않을까 오만 상상을 하며 잠들지 못하던 일요일 밤 대신 까일 걸 알면서도 이런 걸 해볼까, 저런 걸 적용해볼까 찾아보는 건설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지금의 일요일 밤이 훨씬 행복하답니다. 그러니까 전국에 계신 모든 직장인 분들, 개구리 올챙이 적 까먹지 말고 직급보다는 직책에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직무라이팅 그만
규모가 작고 체계가 없는 회사일수록 연차에 비해 막대한 직책을 요구당합니다. 이전에 다니던 곳에서는 기획, 운영, 편집, 디자인, 촬영, 팀 매니징까지 모든 걸 책임지는 차장님이 계셨는데 당시에는 ‘우와- 멋있다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마블 히어로도 아니고 하라고 해도 못할 거 같습니다. 지금의 저도 소속은 마케팅팀이지만 ‘기획’이 필요한 일이면 이 부서 저 부서 불려 다니며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못하겠다고 하면 ‘왜 못 해?’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직무라이팅을 일 년 가까이 당하다 보니 소속뿐만 아니라 직무, 직책까지 혼란의 카오스가 찾아왔습니다.
대혼란 속에서 일을 잘하기 위해 터득한 스킬은 일을 '잘 시키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 부서 발행 스케줄 표와 협력 부서 연차 일정, 컨펌자 미팅 일정을 신경 쓰며 잡음 없이 일을 쳐내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기획이 늦어지면 제작도, 검수도, 발행 일정도 다 늦어지기 때문에 억울하지만 생체 리듬을 한 달 앞당겨 봅니다. 우선 내 일을 하기 전에 이 일을 완수하려면 누구누구가 필요한지 정하고 그들의 일정과 업무량을 눈치껏 파악해 눈치껏 나이스 타이밍에 너무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에 메신저로 업무 요청을 합니다. 물론 저는 시간에 쫓기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데드라인은 항상 넉넉하게 잡습니다. 급한 건이면 내키지도 않는 이모티콘도 보냅니다.
이렇게 오전에는 업무 요청 메신저를 붙잡고 있다가 오후에는 내일 맡길 일들을 미리미리 준비합니다. 귀찮지만 훗날을 위해 가이드도 작성해봅니다. 그러다 보면 퇴근 시간입니다. 세이브를 많이 만들어 놨다고 생각해도 다른 프로젝트에 신경 쓰다 보면 어느새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하하. 뭐 했다고 벌써 다음 달 월간 기획안을 쓸 때가 온 걸까요. 기획자는 언제쯤 마음 편하게 쉴 날이 올까요? 마감이 끝나면 또 다른 마감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만 마감을 마감해버리고 싶습니다.
모든 편집자가 오자를 냅니다. 세상에 오탈자가 없이 완벽한 책은 없어요.
근데 모든 편집자들은 그 실수를 부끄러워합니다.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tvN, 2019) 10화 중
일의 시작과 끝에 서있는 직무를 맡고 있는지라 한 걸음 일찍 움직이고 1mm의 오차에 예민해집니다. 열 번을 확인하고 가이드대로 진행해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이 눈에 보이면 맘이 퍽 상하기도 합니다. 직급은 없고 직책만 무거워지는 이 상황에서 열심히 하자니 호구 잡히는 것 같고 대충 하자니 그건 그거대로 용서가 안 되는 딜레마에 빠져 우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그냥 묵묵히 ‘나의 일’에만 집중합니다. 이것저것 다 하려다 뭐 하나 놓치고 욕먹는 것보다 그냥 내 직급, 직책에 걸맞게 일하다 보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존중하며 버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