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5. 369의 법칙
일을 하다 보면 모든 게 부질없다는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흔히 ‘현타 온다’고들 말하죠. 아무도 신경 안 쓰는 기획안 오와 열을 나 혼자 붙잡고 있을 때, 끝나지 않을 듯한 단순 작업을 혼자서 쳐내고 있을 때, 광고비는 빠져나가는데 도대체 무슨 효과가 있는 건지 모를 때… 이런 일상을 한 달, 두 달, 석 달이 흘러 일 년 가까이 반복하고 있을 때. 그럴 때면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이러고 앉아 있는 건지 몰라 퍽 혼란스럽습니다.
정신 건강에 안 좋은 습관 중 하나가 근본에 집착하는 거라고 합니다. 포트폴리오 맨 마지막 장에 ‘KISS, Keep it Simple, Stupid!’를 써넣은 사람 치고는 쓸데없이 잡생각이 많은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심플하게 ‘일? 시키니까 하는 거고 하면 돈 주니까 출근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면 될 텐데 저는 왜 그게 어려울까요? 결과물은 심플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심플하지 않아 이렇게 퇴근 후에도 답답한 심경을 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인터넷에서 찾은 문장 하나에 힘을 얻어 어찌어찌 무사히 출근을 해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이 기분이랑 평생 싸워야 해!
‘나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딘가 또 있구나’ 하는 위안과 ‘가보자고’하는 왠지 모를 의욕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원인과 본론에 집착하는 피곤한 생각의 열차를 그만둘 수는 없겠죠. 천성인데. 그래도 동지들이 있다는 사실에 소박한 연대감을 느낍니다.
쉬이 지치는 사고 회로를 지닌 탓인가, 짧은 경력 동안 한 업계 안에서 네 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이번 회사와는 곧 1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한 직장인데 신기하게도 가장 오래 다니고 있습니다.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3년 차, 6년 차, 9년 차가 퇴사 욕구가 들끓는 시기라고 하는데, 마침 3년 차인 저는 퇴사병이 도져 3개월, 아니 3시간마다 다 던져버리고 싶은 욕구에 휩싸입니다. 오죽하면 핸드폰 배경화면에 입사일을 d-day로 설정해 놓고 숫자가 365가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글을 쓰는 오늘은 입사 304일이 되는 날입니다. (모두 축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분들 중 남은 사람은 저 하나입니다. 쪽팔림이 적출된 건지, 철이 든 건지 웬만한 일은 울어 넘기고 뻔뻔하게 또 회사로 향합니다. 인생 그거 평생 헛된 기분이랑 싸워야 하는 거, 일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대학 시절 전담 교수님처럼 대기업 홍보 고문이 되어 강연도 다니고 책도 내는 게 꿈이었는데 거창하지 않더라도 광고 일을 할 수 있다는 지금에 만족해야죠. 몇 년 뒤에는 커리어가 또 어떻게 ‘짠’하고 바뀔지 모르니 내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봅니다. 3분기가 지나고 4분기 첫째 달도 중순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일 년 되는 매직을 기대해봅니다.
제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법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부질없이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은 언젠가 보상받을 것이라는 희망. 이 희망마저 없어진다면 너무 허탈할 것 같아서 묵묵히 제가 할 일을 하는 중입니다. 지금 회사에서 제가 하는 일이란 콘텐츠 기획 전반입니다. 다들 ‘아무도 안 볼 건데 뭐하러 열심히 해?’라고 말할 때마다 ‘퀄리티가 중요하다’ ‘기획이 중요하다’ 외치다 보니 제가 잡고 있던 일들에 조금씩 실체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언젠가 팀 리더가 저에게 ‘가람 씨는 글을 쓸 때 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저는 ‘짜치지 않게 쓰는 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번역기로 돌린 듯한 블로그 홍보글, 엔터 키 누르는 걸 깜빡한 SNS 멘션, 인스타 탐색 탭에서 볼 법한 썸네일이 싫어서 맞춤법, 오와 열, 파일명, 이미지 사이즈, 해시태그 등 남들은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것들에 집착하는 게 제 일이랍니다.
내가 얼마나 업무에 진심인가는 언젠가 성과로든 실수로든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아 몰라’하는 순간 놓치는 게 바로 업무니까요. 이전 직장에서 휘뚜루마뚜루 일하는 영상 제작팀이 꼴 보기 싫어서 그네들 일은 모른 채 했더니 한순간에 업로드 영상 파이널 버전도 모르는 폐급 담당자가 되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른 후에야 일 잘하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빠른 팔로업 = 일을 향한 애정의 척도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평소에 부질없다고 생각했던 받은 메일함의 볼드 표시 빨리 없애기, 메신저 문의에 바로바로 답장하기, 진행사항 한눈에 보이게 파일명 작성하기 등도 조금은 쓸모가 있게 느껴집니다.
최근 프로모션 기획을 위해 서칭을 하다가 배달의 민족 브랜딩 콘텐츠 ‘배민다움’ 중 ‘그거 왜 해요?’ 시리즈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배달 앱인데 왜 종이 매거진을 발행하는지, 왜 라이브 콘텐츠를 만드는지에 관한 마케터들의 회상과 인사이트가 녹아든 아티클을 읽고 저는 또다시 쓸모없는 것들을 향한 애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왜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좋으니까’ ‘재밌으니까’. 어쩌면 일을 하는데 세상을 이롭게 만들겠다느니 이름 석자를 널리 알리겠다느니 하는 거창한 동기야 말로 쓸모없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좋아서'라는 심플한 마음 하나만으로도 프로젝트를 향한 애정과 끈기, 그리고 추진력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야 어떻게든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그 무엇도 애정과 진득함은 이기지 못합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건 없지만 애정과 진득함이 퀄리티에 비례한다는 건 누구나 몸소 익혀 알고 있는 불문율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 3시간마다 퇴사를 꿈꿀지 언정 진득함만은 버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월급쟁이가 웬 장인 정신이냐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내일도 출근해 진득하게 일을 할 우리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