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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Oct 17. 2022

밑천 다 떨어졌어요

EP06. 자기복제와 자가증식

맡겨놨냐?



 고백하겠습니다. 밑천 다 떨어졌습니다. 기획 및 콘텐츠와 거리가 먼 이 회사와 함께한 시간도 어언 약 일 년. 같이 레퍼런스를 찾아줄 깐부도, SNS 멘션 작성을 부탁할 후임도 없는 서러운 사내 유일 콘텐츠 기획자는 외롭고 서러워도 혼자서 다 해내야 합니다. 그동안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 리뉴얼 기획만 세 번 있었습니다. 상세페이지 리뉴얼, TF팀 카피 및 기획 담당, 타 부서 제안서 작성, 우리 팀 콘텐츠 기획 및 검수를 쳐내다 보니 가끔씩 ‘대가리 꽝꽝’ 상태가 찾아오곤 합니다.


 ‘대가리 꽝꽝상태란  이상  글자도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지속되는 현상으로 경우에 따라 심장 박동  증가, 식은땀, 과호흡,  쓰림과 같은 신체적 증상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야근은 죽어도 싫은 저는 업무 시간 동안 뭐라도 해내야겠다는 생각에 외장하드부터 시작해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 저장 폴더, 네이버 블로그, 다음 브런치까지  바퀴 돌지만 떠오르는  null. 그야말로 머릿속은 백지상태입니다. 그런 와중에 회의실로 려가 카피   내놓으라고 하는 소리를 듣거나 말도  되는 프로젝트를 기획해보라고 하면 단전에서부터 ‘나한테  맡겨놨냐  시바색갸 튀어나올  같습니다.






광고쟁이의 자기복제



 광고쟁이의 가장 큰 걱정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샤이니와 에프엑스, 뉴진스를 만든 민희진 디렉터 급으로 이름을 날려서 ‘내 스타일 =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면 모를까, 항상 비슷한 결과물을 내놓는 대행사 직원을 좋아할 갑 님들은 없습니다. 쌩신입 시절, 영상 프로덕션에서 만난 팀장님은 한 달에 입찰을 3건이나 준비하면서 기획안이랑 스토리보드를 찍어내듯이 만들어 내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가람아 너 그렇게 일하다가 몇 년만 지나면 금방 힘들어질 수 있어”라고요. 그때 당시에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그 팀장님 말씀대로 되어버렸습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자기 꼬리를 먹고사는 원형 (圓形) 뱀 ‘우로보로스’가 등장하죠. 밑천 다 떨어진 기획자가 밥벌이를 하는 모습도 이 뱀의 형상과 매우 흡사합니다. 아무리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구글링을 계속해도 결과물은 내 지난날의 포트폴리오의 자가 복제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 기각당한 아이디어를 향한 애착이라고 애써 포장하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슬쩍 옛날 아이디어를 ‘바리’ (variation의 줄임말; 이미 있던 아이디어를 요리조리 바꿔서 새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 해서 내놓습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콘텐츠 기획자가 무슨 자판기도 아니고 ‘A 컨셉으로 메인 카피 4개, 콘텐츠 예시 1개’라고 띡 하고 주문하면 딱 하고 결과물이 나오는 줄 아십니까. 저야말로 띡 하고 주문받으면 딱 하고 내놓을 수 있는 말랑한 뇌가 절실합니다.






읽고 보고 느끼는 기획자



 왜 광고 업계에 카피라이터로서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 흐린 눈을 하고 사는 날이 더 많지만 결코 잊지는 않았습니다. 시발점은 스물 하나 여름 우연히 접한 TBWA 카피라이터 김민철 님의 에세이 <모든 요일의 기록>을 읽고나서부터였습니다. 작은 일은 돌다리를 수백 번 두들기면서 평생 뭐하면서 먹고살지 결정할 때에는 책 한 권 읽고 ‘멋져 보이니까’하고 카피라이터가 되겠노라 한 걸 보면 저도 참 인생 되는대로 사는 거 같습니다.


<모든 요일의 기록> (김민철 지음, 북라이프, 2015) 목차 중


 카피라이터 김민철 님의 책에는 그동안 읽고 듣고 보고 배우고, 그리고 쓴 일상의 파편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남편과 유럽을 여행하며 자신만의 취향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부러워서였을까요? 아니면 퇴근 후 라틴어를 배우는 모습이 닮고 싶어서였을까요? 저는 카피라이터가 정확히 뭘 하는 직업인지, 카피라이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른 채 ‘읽고 보고 느끼는’ 글쟁이가 되었습니다. 김민철 님의 에세이에서 영향을 받은 ‘읽고 보고 느끼는’ 이 구절은 제가 처음 광고 일을 시작한 회사 사원증과 명함에도 새기고 브런치 작가 소개글에서도 유용하게 써먹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의 메인 카피가 되어 버린 문장. 09. DEC. 19





광고쟁이의 자가증식



 이 글이 자기소개서도 아니고, 이렇게 장황하게 카피라이터가 되겠노라 결심한 이유를 늘여 놓은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읽고 보고 느끼고 쓰는 것. 이게 바로 우리네 광고인들의 본질이자 매너리즘을 벗어날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읽고 보고 느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몸을 가만히 두질 못합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요 근래 2년간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스무 살 이후 매 해 100편이 넘는 영화를 보고 아카이브를 쌓아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편 수도 줄어들고 형식도 종이 일기장에서 노션으로 바뀌었지만 영화를 보는 행위는 결코 멈추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매달 서점으로 가 소설 신작과 철학 책을 사기도, 가끔 전시회에 가기도, 카페 투어를 가 카페 이름의 뜻이 담긴 명함을 모으기도, 출퇴근 길에는 마케터들의 계정을 탐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영감님들로 일주일을 근근이 버텨냅니다.


영화일기 일부 중


 가뜩이나 잠도 많은데 저라고 주말에 맛있는 거 먹고 이불속에서 미적거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불량식품 같은 주말은 당장은 행복할지라도 다음 주의 저를 힘들게 할 게 뻔하기 때문에 0.1g이라도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 몸을 움직여봅니다. 이렇게 해야 영양가 없는 자기 복제를 벗어나 생산적인 자가 증식이 가능해집니다. 그놈의 인사이트가 뭐라고 카피 한 줄 쓰기 위해 일하는 시간보다 더 길게 읽고 보고 느끼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우리네 숙명이 웃기지만 밥값 하려면 내면의 씨앗을 불리는 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발품 팔아 돌아다닌 노력 덕을 본 적도 많아 죽을 때까지 읽고 보고 느끼는 일만큼은 그만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영감님 영접을 위해 쓴 돈은 아마 광고 일을 하면서 번 돈과 맞먹을 겁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 다시 그 돈을 쓴다는 게 어쩜 자기 꼬리를 먹고 자라는 우로보로스의 모습을 또 연상케 합니다. 하지만 만원 짜리 전시회와 육천 원어치 엽서, 그리고 이천 원짜리 트레이가 새로운 기획안을 찍어낼 원동력이 되어 준다면 저는 기꺼이 또 돈을 쓸 것입니다.


반복되는 소비의 굴레. 27. MAR.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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