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6. 자기복제와 자가증식
고백하겠습니다. 밑천 다 떨어졌습니다. 기획 및 콘텐츠와 거리가 먼 이 회사와 함께한 시간도 어언 약 일 년. 같이 레퍼런스를 찾아줄 깐부도, SNS 멘션 작성을 부탁할 후임도 없는 서러운 사내 유일 콘텐츠 기획자는 외롭고 서러워도 혼자서 다 해내야 합니다. 그동안 인스타그램 계정 운영 리뉴얼 기획만 세 번 있었습니다. 상세페이지 리뉴얼, TF팀 카피 및 기획 담당, 타 부서 제안서 작성, 우리 팀 콘텐츠 기획 및 검수를 쳐내다 보니 가끔씩 ‘대가리 꽝꽝’ 상태가 찾아오곤 합니다.
‘대가리 꽝꽝’ 상태란 더 이상 한 글자도 쓸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지속되는 현상으로 경우에 따라 심장 박동 수 증가, 식은땀, 과호흡, 속 쓰림과 같은 신체적 증상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야근은 죽어도 싫은 저는 업무 시간 동안 뭐라도 해내야겠다는 생각에 외장하드부터 시작해 핀터레스트, 인스타그램 저장 폴더, 네이버 블로그, 다음 브런치까지 한 바퀴 돌지만 떠오르는 건 null. 그야말로 머릿속은 백지상태입니다. 그런 와중에 회의실로 불려가 카피 한 줄 내놓으라고 하는 소리를 듣거나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를 기획해보라고 하면 단전에서부터 ‘나한테 뭐 맡겨놨냐 이 시바색갸’가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광고쟁이의 가장 큰 걱정은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샤이니와 에프엑스, 뉴진스를 만든 민희진 디렉터 급으로 이름을 날려서 ‘내 스타일 =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면 모를까, 항상 비슷한 결과물을 내놓는 대행사 직원을 좋아할 갑 님들은 없습니다. 쌩신입 시절, 영상 프로덕션에서 만난 팀장님은 한 달에 입찰을 3건이나 준비하면서 기획안이랑 스토리보드를 찍어내듯이 만들어 내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가람아 너 그렇게 일하다가 몇 년만 지나면 금방 힘들어질 수 있어”라고요. 그때 당시에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그 팀장님 말씀대로 되어버렸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자기 꼬리를 먹고사는 원형 (圓形) 뱀 ‘우로보로스’가 등장하죠. 밑천 다 떨어진 기획자가 밥벌이를 하는 모습도 이 뱀의 형상과 매우 흡사합니다. 아무리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구글링을 계속해도 결과물은 내 지난날의 포트폴리오의 자가 복제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 기각당한 아이디어를 향한 애착이라고 애써 포장하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슬쩍 옛날 아이디어를 ‘바리’ (variation의 줄임말; 이미 있던 아이디어를 요리조리 바꿔서 새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 해서 내놓습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콘텐츠 기획자가 무슨 자판기도 아니고 ‘A 컨셉으로 메인 카피 4개, 콘텐츠 예시 1개’라고 띡 하고 주문하면 딱 하고 결과물이 나오는 줄 아십니까. 저야말로 띡 하고 주문받으면 딱 하고 내놓을 수 있는 말랑한 뇌가 절실합니다.
왜 광고 업계에 카피라이터로서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 흐린 눈을 하고 사는 날이 더 많지만 결코 잊지는 않았습니다. 시발점은 스물 하나 여름 우연히 접한 TBWA 카피라이터 김민철 님의 에세이 <모든 요일의 기록>을 읽고나서부터였습니다. 작은 일은 돌다리를 수백 번 두들기면서 평생 뭐하면서 먹고살지 결정할 때에는 책 한 권 읽고 ‘멋져 보이니까’하고 카피라이터가 되겠노라 한 걸 보면 저도 참 인생 되는대로 사는 거 같습니다.
카피라이터 김민철 님의 책에는 그동안 읽고 듣고 보고 배우고, 그리고 쓴 일상의 파편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남편과 유럽을 여행하며 자신만의 취향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부러워서였을까요? 아니면 퇴근 후 라틴어를 배우는 모습이 닮고 싶어서였을까요? 저는 카피라이터가 정확히 뭘 하는 직업인지, 카피라이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른 채 ‘읽고 보고 느끼는’ 글쟁이가 되었습니다. 김민철 님의 에세이에서 영향을 받은 ‘읽고 보고 느끼는’ 이 구절은 제가 처음 광고 일을 시작한 회사 사원증과 명함에도 새기고 브런치 작가 소개글에서도 유용하게 써먹고 있습니다.
이 글이 자기소개서도 아니고, 이렇게 장황하게 카피라이터가 되겠노라 결심한 이유를 늘여 놓은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읽고 보고 느끼고 쓰는 것. 이게 바로 우리네 광고인들의 본질이자 매너리즘을 벗어날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읽고 보고 느끼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몸을 가만히 두질 못합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요 근래 2년간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스무 살 이후 매 해 100편이 넘는 영화를 보고 아카이브를 쌓아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편 수도 줄어들고 형식도 종이 일기장에서 노션으로 바뀌었지만 영화를 보는 행위는 결코 멈추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매달 서점으로 가 소설 신작과 철학 책을 사기도, 가끔 전시회에 가기도, 카페 투어를 가 카페 이름의 뜻이 담긴 명함을 모으기도, 출퇴근 길에는 마케터들의 계정을 탐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영감님들로 일주일을 근근이 버텨냅니다.
가뜩이나 잠도 많은데 저라고 주말에 맛있는 거 먹고 이불속에서 미적거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불량식품 같은 주말은 당장은 행복할지라도 다음 주의 저를 힘들게 할 게 뻔하기 때문에 0.1g이라도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 몸을 움직여봅니다. 이렇게 해야 영양가 없는 자기 복제를 벗어나 생산적인 자가 증식이 가능해집니다. 그놈의 인사이트가 뭐라고 카피 한 줄 쓰기 위해 일하는 시간보다 더 길게 읽고 보고 느끼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우리네 숙명이 웃기지만 밥값 하려면 내면의 씨앗을 불리는 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발품 팔아 돌아다닌 노력 덕을 본 적도 많아 죽을 때까지 읽고 보고 느끼는 일만큼은 그만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영감님 영접을 위해 쓴 돈은 아마 광고 일을 하면서 번 돈과 맞먹을 겁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 다시 그 돈을 쓴다는 게 어쩜 자기 꼬리를 먹고 자라는 우로보로스의 모습을 또 연상케 합니다. 하지만 만원 짜리 전시회와 육천 원어치 엽서, 그리고 이천 원짜리 트레이가 새로운 기획안을 찍어낼 원동력이 되어 준다면 저는 기꺼이 또 돈을 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