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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Jul 13. 2022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EP 01. 광고인의 하루

팔자가 심보



 통근 시간만 편도 2시간이 걸리는 저는 늦어도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씻고 찍고 바르고 마시고 입고 뿌리고’의 의식을 끝낸 뒤 7시 9분 출발 지하철에 몸을 싣습니다. 1시간 반을 달리고 달려 마을버스를 타려는데 평소 같으면 3분이면 올 버스가 7분씩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회사 건물 1층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는 무슨 주문이 그렇게 밀렸는지 아메리카노 한 잔 받는데 5분이 넘게 걸립니다. 1층 로비까지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엘리베이터 여섯 대 중 빨리 오는 거에 몸을 구겨 넣고 최상층까지 올라가면 저의 진짜 일과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거 참 시작 전부터 맘대로 되는 게 하나 없네요.


출근만 했는데 입이 마릅니다. 04. JUL. 22






 얼마 전 종영한 박해영 작가님의 <나의 해방일지> (JTBC, 2022) 1화에서 주인공 삼 남매 중 첫째 염기정이 이렇게 말하죠. 팔자는 심보라고요.


“팔자가 뭐냐. 심보래. 그럼 심보가 뭐냐. 내가 심보가 잠깐, 아주 잠깐 좋을 때가 있어. 월급 들어왔을 때, 딱 하루. 어 그땐 나도 내가 좀 괜찮아. 돈 있으면 심보는 좋아져. 사랑하면 착해진다는 말 그거 괜히 있는 말 아니거든. 돈이든 남자든 뭐라도 있으면 심보는 자동으로 좋아져. 근데 내가 돈이 있니 남자가 있니.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어디서 힘이 솟니. 어떻게 심보가 좋을 수가 있냐고. 머리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 싶었는데 기분만 잡치고.”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JTBC, 2022) 1화 중


 웃으면 복이 온다느니 상황이 나아지길 바란다면 먼저 긍정적인 마음가짐부터 챙기라는 말인데 이게 참 쉬우면서도 어렵습니다. 왜냐고요?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힘을 내기란 보통 용기로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바쁘지만 파급력은 없는 인하우스 마케터의 업무와, 혼자서 뭐든 잘 해내는 탓에 이 팀에도 저 팀에도 끼지 못해 이제는 기대고 싶어도 기댈 곳 없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기분,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겪으면 열정 넘치던 사람도 가벼운 우울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자존감이 이미 바닥을 친 사람에게 노력에 대한 사소한 배신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나려고 일부러 밝은 척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받아줄 여력이 되지 않으면 밥을 혼자 먹는 날이 있을 수도, 하루 종일 업무 외 메신저 횟수가 0회를 찍을 수도, 아파도 대타가 없어서 꾸역꾸역 일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에는 언제나 약간의 불행이 드리워져 있으니까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사소한 배신이 잦아지면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슬프긴 합니다.






이면지가 주는 위로



 길었던 출근 전쟁이 끝나고 사내 유일무이한 콘텐츠 기획자로 변신해 업무에 들어가면 사방이 마음 다칠 사건투성이입니다. 마케터 일, 나아가서 광고 일, 더 나아가서 그 어떤 일도 100% 우리 마음대로 되는 건 없는 거 같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진심으로 일에 임했는가에 따라서도 결과가 바뀌긴 하지만 세상에는 우리 진심 말고도 너무 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죠. 이벤트를 하더라도 어떤 광고 소재로 언제 어떤 지면에 콘텐츠를 싣고 어떤 종류의 광고를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전달할지에 따라서 결과는 천차만별입니다. 공수가 들더라도 괜히 A/B 테스트를 하는 게 아닙니다.


 특히나 디지털 광고 대행사를 다니다 인하우스 마케터가 된 지금, 콘텐츠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을 설득시켜가며 내 색깔이 스며든 콘텐츠를 만든 다는 건 굉장히 기가 빨리는 일입니다. 카피 한 줄 제안하는데 1개월을 준비하던 제 입장에서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뇌를 거치지 않고) 개수 치기를 위한 콘텐츠 기획안을 찍어 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남들 눈에는 여전히 카드뉴스 기획하는 데 오전을 다 써버리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담기지 않은 기획안 제작 요청하고 싶지 않지만 일은 해야 하니 디자인팀에 넘깁니다. 욕심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을 한다는 게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닙니다. 성과라도 잘 내보고 싶은데 이거 참 실물 상품을 파는 곳도 아니고 비인기 업종이다 보니 (핑계도 섞인 거 맞습니다) 기깔난 콘텐츠를 올려도 반응은 미적지근합니다.


 그래도 나의 매일매일은 TO-DO List라는 기록으로 남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채널에도 저의 기획과 손을 거친 콘텐츠가 올라가고, 이게 과연 효율이 있는 건가 싶은 광고도 인사이트를 보면 어딘가에서 열심히 노출되고 클릭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런 기록들과 하루 동안 쌓인 업무 메신저 대화창들과 시간 아까워서 버리지 못해 책상 한 편에 쌓인 하루치 이면지가 오늘의 노고를 인정해줍니다. 가끔 앉아서 기획안만 쓰다 보면 ‘과연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하루 끝 눈에 보이는 쓰레기가 오늘 너의 일과는 헛되지 않았다고 온 몸으로 얘기해주는 것 같아 위안이 됩니다.


요즘은 퇴근 후 지하철 역을 빠져나오면 보이는 바닐라 스카이도 위안이 됩니다. 05. JUL. 22






하루치 카타르시스



 MBTI 테스트를 하면 J 성향이 99%에 수렴하는 파워 J형 인간인 저는 퇴근하고 나서도 TO-DO List에서 벗어나지 못해 2시간 퇴근길 내내 집에 가는 길에 어디에서 뭐를 사서 밥은 뭘 먹고 운동은 몇 분을 하고 씻고 나서 글을 쓸지 공부를 할지 누워서 노래를 들을지 계획을 세워봅니다. 남들이 보면 그저 갓생 사는 직장인으로 보이겠지만 실은 업무 시간 동안 해결되지 않은 갈증을 이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 잠이 오질 않아 뭐라도 해보는 거랍니다.


 여전히 팔자가 심보를 만드는 건지 심보가 팔자를 만드는 건지 헷갈립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어요’가 입버릇이 되고 상처받을 바에 기대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 됐지만 매일 TO-DO List와 이면지가 리셋되듯이 글을 쓰거나 자고 일어나면 이 기분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니 그걸로 위안을 얻어봅니다. 뭐가 됐든지 눈에 보이는 흔적들이 우리네 하루를 증명해 줄 테니, 다들 너무 낙심하지 맙시다.


가끔은 와인 1/3병도 도움이 됩니다. 12. JU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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