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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Mar 12. 2024

난 나고 넌 너야.

EP19. 테세우스의 배

서른 살 5년 차 대리


 

 곧 2024년 1분기가 끝납니다. 30대로 살아온 기간도 4분의 1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2019년 12월 처음 광고계에 발을 디딘 순간 다사다난한 이직길이 열렸습니다. 제 사주에 역마살은 없을 줄 알았는데 일에서 만큼은 예외더군요. 5년 차 대리인 오늘날까지 기획자(AE), 카피라이터, 콘텐츠 작가, 마케터, 콘텐츠 에디터, 그리고 다시 카피라이터, 참 많은 직무를 거쳐왔습니다. 일의 본질은 콘텐츠를 만들어 배포하는 거라지만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니면서 참 많은 모습의 저를 발견했습니다. 이력서에 쓸만한 곳은 6군데, 차마 쓰지 못한 곳을 합치면 10군데의 광고대행사를 거쳐갔죠.


28. SEP. 20. 어딘가 뾰족했던 신입 시절의 나.


 그동안 마음은 많이도 마모되고 성격도 변했습니다. 어쩌면 이력에 흠이 갔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항상 면접에 들어가서 받는 질문은 '왜 이렇게 이직을 많이 하셨어요?'니까요. 저는 짧은 시간에 많은 회사의 시스템과 서식을 익혀서 실무에 빠삭한 사람이 되어서 좋다고 생각하는데 남들 생각은 다른가 봅니다. 그래도 저는 단기간에 올린 성과들로 잦은 이직의 흠을 갈음하기를 거듭하며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게 동태눈깔을 지닌 대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일이든 뚝딱 해내지만 일을 쉽게 쳐내는 만큼 성취감은 옛날 같지 않습니다. 얼마 전 밥을 먹으면서 '대리님은 어떻게 글을 그렇게 빨리 쓰세요?'라는 질문을 들었는데... 글쎄요, 광고업 안에서 헤맨 시간이 압도적이라서일까요. 웬만한 오더가 들어오면 깔쌈한 문서로 정리해서 아웃풋을 만드는 데에는 도가 텄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왜 당첨자 선물 리스트를 하루종일 검색해야 하는지, 엑셀 파일은 왜 A1셀에 커서를 올린 뒤 저장해서 넘겨야 하는지, 콘티 상황에 딱 맞는 이미지를 찾아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지금 이렇게 훨훨 날아다니려고 그때 그렇게 헤맸는지도 모르겠네요.






모서리가 긁힌 식탁도 여전히 식탁이야


돌이켜보면, 모서리가 긁혀 상처 난 식탁이 여전히 식탁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듯이,
사람도 삶의 방향이 틀어진다 해도 자기답게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닌가,
긍정해보고 싶었던 것 같요.

<소설 보다 봄 2024> 『오늘 할 일』(김나현 X 소유정 인터뷰 中) 145pp.


 굳이 따지자면 글을 쓰고 싶고 작가가 되고 싶은 거지, 광고 일이 하고 싶었던 거는 아닙니다. 단지 개인 창작물로 밥벌이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글을 쓰는 직업 중에 괜찮은 게 뭐가 있나 찾아보던 중,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찾게 된 거죠. (그때 당시에 재밌게 읽었던 에세이의 저자가 카피라이터였던 영향도 있지만) 아무튼 광고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에는 기획자(AE)로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너무너무너무 힘이 들어서 회사에서 울기도 하고 링거를 맞아가며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땐 유튜브 영상 올릴 때 함께 올라갈 문구 쓰는데 하루 종일 걸리고 하루에 카드뉴스 하나 기획하기도 벅찼었죠. 그리고 비효율적인 야근이 이렇게 많을 줄도 몰랐습니다. 광고회사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따와야 하고, 우리는 그 과정을 입찰이나 경쟁 PT라고 부릅니다. 기존 업무를 하면서 피 터지게 PT 준비를 하면 몸도 마음도 금방 지칩니다. 그리고 PT 준비에는 끝이란 게 없어서 제출 마감 시간 전까지 수정의 수정, 디벨롭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떨어져도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괜찮아지거든요. 그 외에도 AE는 할 일이 많습니다. 한 면접에서 면접관님은 AE란 '제작팀이 일을 수월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도 맞는 게 내외부 커뮤니케이션(메일, 전화, 카톡), 모델 및 스튜디오 섭외, 인플루언서 서칭, 계약서 작성, 기타 문서 작성 등 콘텐츠 외적으로 할 일이 수두룩 빽빽합니다. 그런 와중에 콘텐츠 퀄리티까지 끌어올리는 눈이 있어야 능력 있는 AE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저 모든 것들이 나의 일이라는 걸 깨닫는 데 5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신입 때는 글'만' 쓰고 싶다는 생각에 위에서 얘기한 일들을 하며 마음에 스크래치를 입곤 했죠. 때문에 남들보다 배로 빨리 지치고 닳아 잦은 퇴사라는 핸디캡을 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저것들이 모두 나의 일이라는 걸 알고, 무엇보다도 콘텐츠 퀄리티에 집중할 수 있는 제작팀 소속이 되었습니다. 5년을 헤매고 나서야 제자리를 찾은 듯한 기분입니다.


17. AUG. 24. 마지막 이직을 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입니다.





테세우스의 배 딜레마



 신입 시절에는 몇 억 씩 들여서 외고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다녀와 연봉 2,200만 원 받으면서 택배 박스나 포장하고 있는 제가 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걸 수도 있겠죠.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괴물 미노타우르스를 죽인 테세우스는 델로스를 향하는 배를 타고 미노스 왕으로부터 탈출합니다. 그리고 수 세기가 지나 철학자들은 이렇게 질문하죠. 테세우스의 배의 모든 부품이 교체된다면 그 배를 과연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지, 과연 그 배는 이전의 배와 여전히 같은 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라고요.


 어떤 사물의 모든 부품이 교체되고 나서도 그 사물을 여전히 예전과 동일한 대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서 대상을 사람으로 치환해서 생각해 봅시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회 초년생이 5년 간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성격도 가치관도 달라졌다고 칩시다. 그럼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건가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딘가서 본 문장인데 모든 삶에는 구사일생으로 건진 흔적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 흔적까지 부정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그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지금의 저를 이루고 있는 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함부로 그것들을 다 버리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테세우스의 배는 모든 부품이 교체되었다 한들,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아서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5년 동안 풍랑을 겪어 왔다고 한들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제가 가진 본질과 강점은 흐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니 촬영 소품 사러 발품 팔러 다니고 하루에 수십 개씩 택배 상자를 포장했던 일들도 그리 밉지 만은 않게 느껴지는군요.






 오랜만에 저를 만난 이들은 '참 많이 변했다'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가람이는 가람이야'라고 말해줍니다. 그래요. 사람이 어떻게 언제나 똑같은 상황에만 놓일 수 있겠습니까. 상황에 따라 이런 사람도 되어 보고 저런 사람도 되어 보는 거지.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나, 너는 너입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제야 이 사실을 깨달았으니 앞으로는 내가 하는 일에 너무 비장해지지 말고 유연하게 대처하며, 그저 관조하는 마음가짐으로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5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스물여덟에 시작해 서른 초입에 길었던 <이십팔 세 광고인 일상> 매거진을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신 분들, 따뜻한 댓글 달아주신 분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는 더 성숙한 마음과 대단한 필력을 지니고 새로운 기획으로 만나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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