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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Feb 24. 2024

온리 원이냐 T자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EP17. 조직과 소속, 그리고 책임에 관하여

양가적 소속감



 인생이 박복하다고 느껴지는 하루가 있습니다. 10번째 회사에 들어온 지 100일이 겨우 지난 어느 날, 무용한 야근과 답답한 프로세스에 시간을 낭비하다 보니 억눌러온 퇴사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오릅니다. 그 와중에 하루종일 내리던 비는 눈이 되어 쏟아 붓질 않나, 직원들은 빨리 끝내고 갈 생각은 안 하고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있네요. 카피라이터라는 죄로, 문서 최종본을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로 내 일이 다 끝났는데도 4시간째 집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이유는 조직에 속해 있기 때문 일 겁니다. 아무리 남 눈치 안 본다지만 대행사에서 제안서 제출 전날 혼자 쏙 빠져 집에 간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돈은 적게 벌지만 원고 작성하고 '송부하기' 버튼만 누르면 퇴근할 수 있었던 프리랜서 시절과는 다릅니다. 조직과 소속감은 참 양가적입니다. 프리랜서 시절에는 그렇게 조직의 안정감이 그립다가 이제는 조직의 암묵적인 룰이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환멸이 납니다.


길고 긴 야근 후 눈발을 뚫고 집에 왔습니다. 21. FEB. 24





카피라이터는 다 잘해야 합니다

직능 조직 VS 프로젝트 조직


 

 회사라는 큰 조직 안에는 그룹이나 팀 같은 작은 조직이 존재합니다.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자면 하나는 각 직무를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 놓은 직능 조직 (aka 기능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광고주나 과업 별로 다양한 직무군이 하나의 팀이 되는 프로젝트 조직입니다. 광고대행사를 다니게 되면 (다른 곳도 마찬가지인가요?) 두 조직에 동시에 속하게 됩니다. 이를 테면 제작팀(직능 조직)에 속한 카피라이터이자 A, B, C 브랜드의 카피를 담당하는 (프로젝트 조직) 사람이 되는 것이죠.


 보통 광고대행사에서는 기획자(AE) 2명과 디자이너 1~2명, 영상 PD 1~2명, 그리고 카피라이터 1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입니다. 다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신규 입찰을 위한 제안서를 작성하고 (싸우고 서로 욕하는 게) 광고쟁이들의 일입니다.


가끔 일하다 보면 이런 생각도 왕왕 듭니다.


그중에서 카피라이터는 참 모호한 존재라 소속은 제작팀이지만 기획팀 메신저에도 들어가 있습니다. 양가적인 건 조직뿐 아니라 저도 마찬가지네요. 무튼 제가 하려던 말은 카피라이팅이란 기획인지 제작인지 참 명확히 구분 짓기 어려운 직무라는 것입니다. 특정한 툴을 사용하는 디자이너나 영상 편집자는 명백한 제작자입니다. 하지만 카피라이터는 기획 초반부터 인볼브 하며 아이디어를 내고, 슬로건을 도출하고, 이를 기반으로 콘텐츠를 만들거나 제안서를 쓰고 기획팀이 쓴 문장을 매끈하게 다듬습니다. 그리고 가끔 취재도 하고 촬영지시서도 쓰고 비주얼 디렉팅도 합니다. 사내 CD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이상하게 카피라이터에게는 기획자의 자질과 제작자의 자질이 엄격하게 요구됩니다.






온리 원이냐 T자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두 직능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은 책임 소재가 모호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책임감은 두 배가 되면서 저의 퇴근 시간은 미지수에 빠지게 되죠. 야근이 일상인 광고대행사 인간 주제에 매일같이 워라밸을 복창하는 사람으로서 골머리가 썩습니다. 책임 소재가 모호한 이상, 나의 퇴근 시간을 지키기 위해선 팀워크에 신경을 잘 써야 합니다. 일단 나부터 들어가 있는 모든 프로젝트의 마감 및 발행, 행사 일정을 체크하고 얼기설기 얽혀 있는 스케줄을 잘 파악해 펑크가 나지 않게 합니다. 제작 일정을 고려해서 미리미리 기획팀과 이야기하며 기획안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어떻게든 윗단의 컨펌을 받아 일을 진행시킵니다. 그래야 만드는 사람도 편하거든요. 그 와중에 오탈자 확인은 기본이요 내가 쓰는 글의 퀄리티까지 올려야 하니 대행사 카피라이터는 쉴 새가 없습니다.


제안서 쓰는 일개미. 개미는 오늘도 뚠뚠. 06. FEB. 24


 한 직무에서 빛을 발하는 온리 원이 될 것이냐 모든 일을 고루 잘하는 T자형 인재가 될 것이냐는 광고쟁이들의 숙명적인 고민 같습니다. 마치 햄릿의 명대사처럼요. ‘온리 원이냐 T자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지금까지 회사에서는 T자형 인재가 되기를 강요받아 왔습니다. 아무래도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임원들의 쩨쩨한 마음가짐 때문이겠죠. 글도 잘 써야 하고 문서도 잘 만들어야 하고 택배 포장도 깔끔하게 해야 하고 영상 레퍼런스도 잘 찾아야 하고 광고주 커뮤니케이션도 잘해야 하고 메일도 깔끔하게 써야 하고 스튜디오랑 모델 컨택도 센스 있게 해야 하고 비주얼 연출이랑 연기 디렉팅, 푸드 스타일링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지금 다니는 회사는 이렇게까지 많은 일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 감사하며 기꺼이 온리 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받아들여 보기로 했습니다. 이제까지는 급하게 일을 쳐내느라 놓쳤던 디테일에 신경 쓰며, 조금은 천천히 depth 있게 일을 대하기로 했습니다.






 아침마다 메일함에 쌓이는 뉴스레터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빨리 소진돼 버리는 것보다 적절한 상태로 지속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라고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신입 시절 저는 T자형 인재가 되기 위해 매일 목표를 상향조정해 왔습니다. 1~2년 차 기획자, 카피라이터가 적당히 글 잘 쓰고 팀 안에서 무난히 지내면 된 거지, 뭘 그렇게 더 하겠다고 아등바등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지금도 매일 아침 좋은 문장을 모아 아카이빙하고, 저녁이 되면 만년필로 필사를 하고 자투리 사전을 만들어 나만의 문체로 소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작팀 카피라이터로서 일을 잘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언젠가는 과장이 되고 그다음에는 팀 리더가 되면서 스케줄이나 인력 관리에도 힘쓸 날이 오겠지만 지금은 그저 카피라이터로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퀄리티의 글을 뽑아낼 수 있을까, 그것 하나에 집중해 보는 시간을 갖으려고 합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제작팀으로서 제 정체성과 소속감을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요?


점심시간에는 짬 내서 양질의 글 읽기. 03. JAN.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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