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람 Feb 28. 2024

마음이 합니다

EP18. 일하는 마음과 번아웃에 관하여

불행은 여러 얼굴을 지니기 마련



 일을 하다가 행복했던 경험은 손에 꼽지만 마음을 다쳤던 적은 부지기수입니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다’와 마찬가지로 일도 행복한 모습은 정해져 있지만 불행한 사건은 여러 얼굴을 하고 다가옵니다. 야근이 많아서, 사수에게 혼나서, 클라이언트가 뻔뻔해서, CS를 하다가 지쳐서, 매너리즘에 빠져서,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해서, 진행 속도가 내 성에 차지 않아서, 중요한 걸 놓친 탓에 프로젝트를 망쳐서, 고문관 때문에 답답해서, 심지어는 출근했는데 할 일이 없어서…. 우리는 일을 하면서 참 많은 이유로 마음을 다칩니다. 


무용한 야근에 마음이 다치기도 합니다. 17. JAN. 24


 다치고 지친 마음을 이끌고 사무직 기준 매일 꼬박 8시간을 앉아 일정한 일을 쳐내는 건 쉽지 않습니다. 하루는 월급을 보며 버티고, 다른 하루는 연차를, 또 다른 하루는 공휴일이나 무두절을 바라보며 버티지만 한 달에 20일, 정해진 시간에 사무실에 나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침이 온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여겨져 잉여로운 밤이 끝나지 않길 비는 그런 날도 있을 겁니다. 






노란 불이 그렇게 깜빡이는데도 너 모를 거야



네가 다 시들어 가는 것도 모를 거야.
인생이 전부 노란색일 거야.
노란 불이 그렇게 깜빡이는데도 너 모를 거야.
(…)
근데, 내가 안 행복한데 누가 행복하겠어?

드라마 <정신병원에도 아침이 와요> 5화 인생에서 노란색 경고등이 깜박거릴 때 中


이미지 출처: unsplash


 <정신병원에도 아침이 와요> (Netflix, 2023)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작년 5월 우울증과 번아웃 판정을 받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터라 각 에피소드마다 주인공들에게 더욱 감정이입이 잘 되었습니다. 5화에서는 일과 육아로 너무나도 바쁘게 살던 나머지 ‘가성 치매’(원인은 우울증으로 증상은 치매와 비슷하다. 기억력이 나빠지고 집중력이 떨어지고 진짜 치매보다 급성으로 발병하며 진행도 굉장히 빠르다.)에 걸린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치료를 받는 도중 깨닫게 되죠. 본인의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노란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었는지를요.


 제 인생에서도 노란 불이 미친 듯이 깜박거릴 때가 있었습니다. 2023년 5월 어느 날 출근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발걸음은 회사 옆 정신의학과를 향하고 있었고 그날 전 심각한 우울증 판정을 받았습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간 받아왔던 업무적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한국인들은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마조히스트입니다. 혹은 그런 성향이 매우 짙습니다. 그래서 본인 마음에서 그만하라고 경고음이 울리는데도 불구하고 바보같이 그걸 못 알아차리고 꾸역꾸역 일을 해내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저 또한 그랬고요. 


실컷 쉬면서 존애하는 요시다 유니 개인전도 보고 왔습니다. 17. AUG. 23


 그런데 이미 과부하가 온 머리에서 연기 말고 뭐 대단한 게 나오겠습니까? 경력에 틈이 생기는 게 두려워서, 돈을 벌지 못하는 게 싫어서 아등바등 버텨왔는데 마음이 무너지니까 다 필요 없고 나를 챙기는 걸 우선으로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래서 꼬박 4개월을 위스키와 유튜브 브이로그 편집, 그리고 일상으로의 복귀에만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만들고, 내가 먹을 걸 내 손으로 직접 준비하고, 직접 필사를 하며 좋은 글의 호흡을 익히는 과정에서 그동안 얼마나 일만을 위해 달려왔는지 깨닫게 되더군요. 직접 물성에 닿으며 행복을 연습하는 시간은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어주었습니다. 






결국엔 마음이 합니다



마음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생각하다가도 결국은 마음이 모든 걸 다할 때가 있다.

<일하는 마음과 앓는 마음> 월요일의 잡념들, 박문수 167pp.


 우리가 일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돈을 벌기 위해서? 가족이나 반려동물을 부양하기 위해서? 커리어 패스를 위해서? 아니면 그저 내 자긍심을 위해서? 모두 맞는 말이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걷기 위해 일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이 시켜서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이 다쳤는데 누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돈만 벌 수 있다면 마음쯤 얼마든지 다쳐도 괜찮다는 건 개구라뻥 같은 소리입니다. 


 일이 가져오는 시시각각의 마음에 관해 엮은 책 <일하는 마음과 앓는 마음> (이봄, 2022) 중 박문수 님의 에피소드에서 이런 말이 나오죠. ‘마음이 뭐가 그렇게 중요할까 생각하다가도 결국은 마음이 모든 걸 다할 때가 있다.’고요. 맞습니다. 일단 내 마음에 초록불이 켜져야 근태도 지키고 피드백도 수용할 줄 아는 틈이 생기는 겁니다.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는 더 이상의 대미지를 수용할 수 없어 사람이 수동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제안하는 작은 개선 사항에도 날카롭게 반응하며 발전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죠.






 파자마 브랜드 ‘조스라운지’의 유성범 기획자님은 브랜드 성장의 분기점은 기획자로서 '내 자존심이 상했을 때'라고 말합니다. 저도 뭘 하든 잘한다 박수만 쳐주는 회사에서 보다 많은 피드백이 있었던 곳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뼈를 때리는 조언에서 디테일적인 의견까지 많은 피드백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고 일을 더욱 넓고 면밀하게 살피는 눈을 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마음에 약간의 틈을 남겨 두었으면 합니다. 마음의 틈을 만드는 의식은 간단합니다. 낄낄 메이트와의 커피챗, 즉흥적인 오후 반차와 낮술, 월급날 나를 위한 작은 투자… 이런 것들이 모여서 뭉근하게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는 겁니다. 그래요, 결국에는 마음이 하는 겁니다.


즉흥적으로 오후 반차를 내고 낮술을 즐겼습니다. 최근 저지른 일 중 가장 미친 짓이자 맘에 드는 짓입니다. 16. FEB. 24


이전 08화 온리 원이냐 T자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