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이직과 정착에 관하여
윤석열 나이는 모르겠고 한국식 나이로 스물아홉이 끝나기 며칠이 채 안 남은 12월 중순. 잘 만나던 애인과 이별을 했습니다. 우리가 헤어지는 이유 중에는 제 잦은 이직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러더군요. ‘누나 정도 나이면 자리 잡을 생각을 해야지, 왜 자꾸 이직을 해?’라고요. 물론 2023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회사를 세 번 옮기긴 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정상적인 패턴은 아니라는 건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퇴사 후 출근까지 마가 뜬 시간 동안 돈을 안 번 것도 아니고 좀 더 나를 위하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소망에 이직을 결심한 건데 그런 소리를 들으니 벙 쪘습니다. 그 순간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돌아서 생각해 보니 그냥 일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으로, 그렇게 결정짓기로 했습니다.
잦은 이직을 흠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는 오히려 자랑스럽습니다. 잦은 이직이라는 옐로우 카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연봉 높여서 내가 가고 싶은 곳 턱턱 골라서 가는데, 이것도 능력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랍니다. 마지막으로 이직한 회사는 이제 3개월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제안서도 세 개 제출했고 2억 9천만 원짜리 과업도 따냈습니다. 스물아홉이었던 전 꽉 찬 계란 한 판, 서른이 되었고 스물여덟에 쓰기 시작한 이 매거진도 일 년이면 다 써내려 갈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붙잡고 있네요.
우리 엄마가 저를 처음 만난 나이가 스물아홉입니다. 근데 저는 아직도 엄마아빠가 없으면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철부지 서른 살입니다. 보통 이때가 그럴 때라고 하잖아요. 아이 돌보는 부류와 아이돌 보는 부류로 나뉘는 때라고.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 몬스타엑스 최고. 짜릿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도 이제는 결혼해야지, 정착해야지라는 말을 10초에 한 번씩 내뱉습니다. 그런데 과연 정착이라는 게 장기근속과 결혼, 그리고 출산만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돈을 버는 행위와 버티는 행위, 그 사이에서
아무래도 우리 인간은 확신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정착에 목을 매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자리를 잡다, 닻을 내리다, 장기근속을 하다 등 정착을 표현하는 말은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내뱉는 ‘정착’이라는 말의 뜻에 사회적 잣대는 얼마나 많이 가미되어 있을까요. 정착이라는 건 개인이 어딘가 뿌리를 내리는 행위인데 어째서 거기에 개인의 의견이 아닌 타인과 사회의 의견이 더 많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요. 일단 지금 제 주변 지인들의 화두인 결혼부터 놓고 보자면 그놈의 로맨틱 러브 이데올로기 때문에 연애-결혼-출산의 루트를 밟아야지만 성공한 사랑을 한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서른 되면 응당 짝을 찾아야 하는 줄 압니다. 다들 시기에 쫓겨서 하는 결혼은 하기 싫다지만 그래도 이 시기에 연애 안 하면 불안하다고 하는 게 저를 포함한 제 주변 지인들의 심리입니다. 스물아홉에 사귄 애인과도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갔었습니다. 핫플레이스 가서 사진 찍고 섹스만 하고 끝나는 라이트한 연애가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는 연애란 이런 걸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또 연애가 끝나고 생각해 보니 정말 3분 카레처럼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결혼 적령기 (이런 표현도 싫지만) 때 만난 애인이라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
다시 일 얘기로 돌아와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결국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것, 혹은 그런 상태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저 역시 광고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공항에서 전공과 전혀 다른 일을 하며 보냈던 시간이 있었었죠. 그리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내가 좋아하는 일로는 입에 풀칠하기 힘드니까 투잡, 쓰리잡을 뛰면서 청춘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출근을 하고, 정해진 양의 글을 퀄리티 있게 써내는 일상이 고되기도 하지만 적어도 제가 원해서 선택한 일을 하면서 먹고살고 남을 정도의 돈을 번 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들이 어찌 보든 말든 전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20대 초반 일본에서 처음으로 취업 준비를 하며 하루에도 몇 군데 면접을 보던 시절, 저는 광고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으면서도 정확히 어떤 직무에 도전해야 좋을지 조차 모르는 바보였습니다. 그래서 본인에게 어떤 직무나 부서가 맞을 것 같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결국에 최종 합격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로 취업 시장에 내던져진 탓에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 같네요.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는 광고 업계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저와 딱 맞는 직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AE, 기획자, 에디터, 작가, 카피라이터 등 많은 일을 해온 결과 저는 카피라이팅이 제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떤 과제가 주어지면 그에 맞는 컨셉을 추출해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을 통솔하는 일이 제 성격, 적성과 찰떡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5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예비) 취업 준비생이나 사회 초년생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은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서 기꺼이 유목민이 되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시기는 상관없습니다. 누군가는 일 년 안에 원하는 일을 찾아 정착을 하게 될 수도, 또 누군가는 저처럼 오 년이 걸려 돌고 돌아 원하는 일을 만나게 될 수도 있겠죠.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건 시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많은 실패를 해보라는 겁니다. 바다 같은 인생에서 파도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파도를 막을 수 없다면 우린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하지만, 그 태도는 우리가 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풍랑에 휩쓸리는 인생을 택할 건가요 아니면 물길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인생을 택할 건가요? 저는 차라리 후자를 택하고 넘어지기도, 물에 빠지기도 하면서 많은 실패를 맛보는 길을 택할 겁니다.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얻는 인사이트가 더 많은 법. 실패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서 다음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또, 실패의 과정 속에서 내가 모르는 나를 발견하고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실패를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장은 쪽팔릴지 모르더라도 다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언젠가 이렇게 넋두리하듯 돌아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