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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Aug 10. 2023

나를 찾아 떠나는 맹랑한 소비

EP15. 적금과 소비에 관하여

돈으로 분노를 승화시킬 줄 아는 어른


 

 저에게는 네 가지 적금이 있습니다. 1. 청년희망적금 2. 내맘대로적금 3. 주택청약 그리고 4. 시발적금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청년희망적금에 매월 한도액인 50만 원을 붓고 싶지만 광고판 대리로서는 무리입니다. 빚은 없다만 매달 나가야 할 카드값과 유흥비가 저를 괴롭힙니다. 마지막 시발적금은 말 그대로 일이나 사람 때문에 시풀거릴 때 옥상으로 올라가 넣는 적금입니다. 비용은 분노의 정도에 따라 4,444원, 14,444원, 44,444원 이렇게 차등 적용되겠습니다. 만기일은 보통 퇴사일 (= 퇴직금 받을 수 있는 1년 되는 날)이나 퇴사 D-6개월, 퇴사 D-3개월 이런 식으로 지정해 둡니다. 만기일을 지킨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 퇴사했으니 시발 적금은 잠시 BYE입니다.


 왜냐하면 광고인, 특히 에디터는 인풋이 없으면 아웃풋도 없는 부류이기 때문입니다. 촬영구성안도 뭘 가본 놈이 잘 쓰고, 글도 뭘 먹어본 놈이 잘 쓴다고. 하나라도 경험을 더 해봐야 뭔가 싸지를 수 있습니다. 그게 똥이 될지 된장이 될지는 우리의 팀장님과 광고주의 입맛에 달렸지만요. 어쨌든 많이 읽고 보고 느껴야 똥이라도 한번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가끔은 공식적으로 회사돈을 써서 아웃풋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은 욕대로 처먹은 저의 아픈 손가락 ‘카약’ 콘텐츠가 바로 그 예시죠. 입 싹 닦고 있다가 현장 가니까 그제야 무슨 모터보트 빌리는 데 50만 원이 추가된다고 하는 사장님 때문에 안 그래도 축축한 등이 더 축축해졌습니다. 네고왕 한 편 찍고 할인받긴 했지만 똥 같은 콘텐츠 만드는 데에도 큰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0.1초 만에 스크롤해 버리는 광고 이미지 제작비로 얼마가 들어간 줄 알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내 곧 품

내가 드는 것이 곧 나의 품격이다


 

 광고인은 아웃풋을 만들기 위해서도 돈을 써야 하지만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도 지출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속물근성에 절어 있는 저는 사람을 볼 때 가방과 지갑을 먼저 봅니다. 과연 그 사람의 나이와 직급에 걸맞은 브랜드인지. 그 사람의 이미지와 잘 맞는 컬러와 모양인지 유심히 보죠. 판단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남들도 제 옷과 가방, 지갑을 보고 판단할 것입니다.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드는 것이 곧 나의 품격이 되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저는 명품 따위 안 들고 다니는 것이 멋인 줄 알면서도 50만 원이 넘는 입생로랑 지갑을 들고 다니고 5만 원에 육박하는 동일 브랜드 립을 바릅니다.


나의 처음이자 당분간 없을 명품 소비. 30. NOV. 22


 대리 단 기념으로 퇴직금을 털어서 산 첫 명품, 입생로랑 지갑. 더현대 서울 여의도점 입생로랑 매장에 들어가 50만 원 따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거 주세요’라고 말하면서 목소리는 떨리고 겨드랑이와 등은 축축해져 갔습니다. 참고로 이때 혹한 겨울이었습니다.






제가 퇴직금 5분의 1을 한 번에 털어 명품을 산 이유는 가진 게 없는 대리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2019, tvN)에서 배타미 팀장님이 말씀하셨듯, ‘가진 게 많을 땐 감춰야 하고, 가진 게 없을 땐 과시해야 되거든요’. 직급이야 하나 생겼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가진 것 없는 작고 소중한 나. 배타미 팀장님은 ‘그럴 땐 몸집을 부풀려야 하는 거’라고 말하며 동시에 ‘이런 세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세상이 그래요’라고 합니다. ‘투쟁할 수 없으면 타협해요. 그리고 이런 세상 만드는 데 내가 어른으로서 가담한 것 같아 미안해요.’ 이렇게 덧붙이죠. 투쟁할 수 없으면 타협하는 나. 그리고 이런 세상 만드는 데 어른으로서 가담하는 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나. 그래서 저의 시발 적금은 만기를 보는 날이 없습니다.


 언제쯤 돼야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이영지처럼 검은색 비닐봉지 달랑달랑 들고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소비는 새로운 나를 알게 합니다. 29번째 생일에는 짝꿍과 위스키를 마셔봤는데 제가 바닐라향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점점 늘어나는 기쁨이었죠. 또, 최근에는 퇴사 후 집에 머물며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온갖 심플 레시피를 시도하는 중입니다. 재료값은 들어가더라도,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뿌듯함과, 그걸 입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감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짜릿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위스키는 '달위니 15년'입니다. 스물아홉 먹고 처음 깨달은 사실입니다. 5. JUN. 23





그래서 돈은 언제 다시 벌 거니?


 

 퇴사한 지 한 달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니 주머니 사정이 퍽퍽해져 갑니다. 덩달아 인심도 자린고비가 되어버렸죠. 마지막 월급 받고 기뻤던 게 한 달 전인데, 이제 며칠 뒤에는 들어올 월급은 없고 블로그 글쓰기 알바로 들어오는 7,000원, 3,500원으로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계산상 필요한 돈을 벌려면 2,000자 원고 143건은 써야 하는데. 이거 이거 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 사람인에 들어가 입사 지원을 합니다.


 ‘백수 생활의 끝은 돈이 다 떨어졌을 때’라는 말은 진리입니다. 적금 중 아껴둔 내맘대로적금은 깨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개미는 오늘도 뚠뚠 2,000자짜리 부동산/생활 꿀팁/건기식/가구점/맛집 홍보 글을 쓰며 빵꾸 난 곳을 메우려고 합니다. 비 내리는 거 손바닥으로 막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이럴 때 유튜브나 브런치라도 빵 터져서 수익 창출을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저는 아직인 것 같으니 정직하게 일하고 정직하게 벌어야죠. 그래서 돈은 언제 벌 거냐고요? 지금 벌고 있잖습니까. 태풍 지나가면 또 쨍하고 해 뜰 날 오겠죠. 그래서 맹랑한 소비는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찾기 위한 낭비 없인 낭만도 없으니.


입생로랑 지갑 사고 열어 본 포춘 쿠키. 지출에도 실패 없인 성공도 없으리. 30. NOV.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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