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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람 Jul 18. 2023

젊은 ‘나’의 행진 많관부

EP14. 부계와 부캐에 관하여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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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그렇듯 갑자기 삘이 딱 꽂혀 시작하게 되었죠. 여섯 번째 퇴사 후 가장 잘한 짓이자 미친 짓입니다. 상담 선생님도 유튜브를 시작했다는 말에 두 눈이 긍정으로 동그래지셨죠. 여기서 상담 선생님이란 최근 다니기 시작한 정신과 선생님을 말하는 겁니다. 4월 말 즈음, 출근길에 나는 지금 회사가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고, 그래서 회사 근처 정신과로 출근했습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설마설마했던 우울증 판정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꾸준히 상담받고 약을 먹으면 나아지는 것이니까. 끝도 없을 것 같던 블루-에 끝이 있으리란 믿음이 생긴 것이었죠.


파일럿 편을 편집하던 어느 날 새벽. 7. JUL. 23


 회사에도 제 상황을 털어놓았지만 여전히 안대리는 자신의 몫을 해내야 했습니다. 아니, 회사에서 배려해 준다며 촬영에서 빼 주거나 재택근무를 시켜준다고 했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스트레스를 끝내는 방법이 바로 일로 나 자신을 show and prove 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던 탓이었죠. 그래서 지친 상태로 마른행주를 짜내듯 촬영 구성안을 쓰고 매주 적어도 한 번씩 촬영 현장으로 향했습니다.






 어느 날은 성수에서 촬영이 있었습니다. 핫플레이스에 친하지도 않은 담당 PD와 단 둘이 가서 일을 하려니 서러웠습니다. 그냥 집에 가기 아쉬워 근처 유명한 문구점에서 무지 노트와 파란 수성펜을 한 자루 샀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집으로 돌아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닥치는 대로 필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수 point of view에서. 27. APR. 23


 손바닥 보다 조금 큰 노트를 만난 이후,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을 때면 그 노트를 펼쳤습니다. 단편 소설, SNS, 잡지 등 에서 본, 마음에 든 구절들을 몇 시간이고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필사 노트 맨 앞장에는 브런치스토리 메인 화면에서 언젠가 본 문장, ‘나를 잃었을 때 미친 듯이 쓰기 시작했다.’가 적혀 있죠.


뇌가 시끄러우면 미친 듯이 필사를 했습니다. 30. APR. 23


그러고 보니 그때 브런치 업로드를 올리지 않은 지 몇 개월은 지나 있었습니다. 입사 직후 단 한 글자도 내 글을 쓰지 못했다는 증거죠. 창조를 하기엔 소진된 상태였지만 어떤 형태로든 내 손으로, 회사의 것이 아닌 내 아웃풋을 내고 싶었나 봅니다.






젊은 ‘나’의 행진, 많관부


 

 SNS에 ‘부계’가 존재한다면 인생에서는 부캐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가람 대리, 콘텐츠 에디터 대신 브런치 작가 ‘가람’이나 유튜버 ‘에끌’이 제 부캐입니다. 퇴사 후에도 늘 SNS 자기소개란에 카피라이터 겸 콘텐츠 기획자라고 소개하는 저는 사회적 지위라는 감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지도 모릅니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 (2022, tvN)에서 ‘인주’는 ‘화영’의 인스타그램 부계정을 보면서 이런 뉘앙스로 얘기를 합니다.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는 것 같다’고요. 그렇습니다. 회사에서는 늘 똑같은 옷만 입고 조용히 자기 일만 하던 화영 언니와 부계 ‘진미경’의 모습은 딴 판입니다. 진미경은 소개란에 자신을 ‘미래에서 온 경리’라 적어 놓고 누구보다 화려한 라이프를 즐기는 모습을 포스팅합니다.






 저도 화영도 현실의 무게를 완전히 던져버리진 못했습니다. 부계에서조차 직업을 언급하는 워커홀릭이라니. 밝게 생각하면 무언가 하나라도 잘하고 자랑하고 싶은 스페셜리티가 있다는 건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직업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진 못했지만 부계에서만큼은 내가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제 부계에는 화영처럼 한 가정을 멸망시키겠다는 큰 그림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충만하게 하겠다는 다짐은 있답니다.

 몸은 퇴사했지만 마음만은 회사인 일지 언정, 부계 활동 중에는 마음이 가볍습니다. 뭐 한 자라도 더 적고, 한 컷이라도 더 찍기 위해 몸을 움직입니다. 일이 없더라도 만들어서 나갑니다. 나가면서 생기는 비용은 또 벌면 되기 때문에 상관없습니다. 유튜브 수익 창출을 위해선 구독자 1000명과 시청 시간 4000시간을 달성해야 합니다. 고작 구독자 7명, 시청시간 2.6시간을 자랑하는 저에게 수익 창출은 먼 길 같습니다.


 그래도 나쁜 생각을 나쁜 생각으로 갉아먹는 것보다 좋은 에너지로 대신하는 것이 백 배 천 배 낫습니다. 그렇기에 젊은 ‘나’의 행진, 많관부 해주시길 바랍니다.




+덧) 제목은 이서수 작가님의 <젊의 근희의 행진> 마지막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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