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JD에 대하여 - 에디터는 뭐 하는 존재인가요
‘축 하관 데뷔’ 발행된 담당 브랜드 포토 콘텐츠를 캡쳐해 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며 쓴 문구입니다. 사진 속 저는 아메리칸 레트로 무드의 옷을 입고 양손에 도넛 케이크를 든 채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콘텐츠 에디터로 이 회사에 입사했는데 하관 모델까지 데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소셜 미디어 대행사에 기존 올드 미디어, 잡지사의 에디터 개념을 도입하면 이렇게 JD에 혼란이 오기 마련입니다. 아니면 그냥 적은 인원으로 최대의 아웃풋을 뽑아내야 하는 중소 대행사의 슬픈 현주소일까요? 소규모 기업의 콘텐츠 에디터는 오늘도 동분서주하느라 발바닥에 땀 마를 겨를이 없습니다.
어느 날은 기자회견 마이크를 사겠다고 동묘 풍물 시장을 몇 시간이고 훑질 않나, 촬영 현장에서는 모델 헤어 메이크업 체크하고 푸드 스타일링을 하느라 손가락은 퉁퉁 부어 있기 일쑤입니다. 거기다 스튜디오 촬영이라도 있는 날에는 결제를 내가 했다는 죄로 온갖 사람들은 제게 주차 공간, 인근 식사 스팟, 와이파이 비밀번호, 심지어는 화장실 위치까지 물어봅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주인공 ‘앤디’가 된 기분이랄까요. 앤디는 양 겨드랑이 가득 소품 안고 외근 뛰다가 사고라도 당해 며칠 쉬기라고 하지, (아, 그건 에밀리였나요?) 근데 전 신장에 세균이 들어가 사경을 헤매도 연차를 까야했습니다.
그러다가 뭐라도 하나 확인 안 된 상황이 있으면 욕을 먹는 게 콘텐츠 에디터입니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날씨가 안 좋아도, 밥이 맛없어도 조연출 탓이라는 대사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습니다. 대리급이나 되어서 촬영장 가는 곳곳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사 모아야 한다니, 일하는 모습을 우리 가족과 애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습니다.
하도 억울한 마음에 어느 날은 제가 지원했던 채용 공고를 뒤져 JD를 다시 확인해 봤습니다. 그 어디에도 에디터가 모델, 장소 섭외에서 소품 구매, 비주얼 디렉팅, 그 외 문서 작업을 혼자 해내야 한다는 설명은 없었습니다. ‘콘텐츠 퀄리티 관리’ 이 한 문장만 적혀 있을 뿐. 퀄리티 관리에 저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는 걸 간과한 제가 바보일까요, 아니면 에디터라는 애매모호한 직군을 소셜 대행사에 적용시켜 악습을 만들어 온 회사가 잘못일까요? 저와 함께 입사한 그룹장님께서도 처음에는 이 회사에서는 뭔 에디터가 이런 일까지 하냐고 놀라셨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하십니다. 그도 그럴 게 실무진은 손이 부족하고 회사는 돈이 부족하니, 어쩌겠습니까. 있는 인원이 죽어라 뛰는 수밖에요.
캠핑 컨셉으로 포토와 릴스를 찍어 달라는 광고주 님의 의견에 따라 야외 캠핑 스튜디오를 예약한 적도 있었었죠. 머피의 법칙처럼 우리네 촬영날에만 비가 내려 일정을 다시 조율해야 하는 수고스럽고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죠. 모델 에이전시에 연락해 양해를 구하고, 캠핑 스튜디오에 전화 때려서 비 오니까 날짜 한 번만 변경해 달라고 애교를 부리고, 바뀌는 일정 따라 변경된 제작팀 인원 데리고 다시 제작회의를 하고… 그래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다 일하면서 겪을 수 있는 사건사고라고 위로했었습니다. 기획팀 식구들과 촬영 전날 날씨 요정 인형 만들어 가면서 하하 호호 웃어넘겼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2분기 동안 쌓이고 쌓이니 지하 주방 스튜디오에서 다음 날 소품으로 쓸 양념통에 소금 후추를 옮겨 닮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나도 짠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양념통은 너무 크다는 의견이 있어서 더 슬펐습니다.)
쉬는 날에도 저는 집에서 쿠팡 로켓배송으로 받은 가랜드를 미리 만들어 놓곤 했습니다. 의상이랑 소품 구매 후 집으로 바리바리 싸들고 와 손수 태그를 떼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혀를 끌끌 차셨지만 저는 이것도 제 일이라며 열심히 했습니다. 근데 이제는 너무 지쳐버렸네요. 그래서 전 소금 후추를 옮겨 닮던 날, 팀장님에게 퇴사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팀장님에게 카피라이터, 콘텐츠 기획자로 커리어를 시작해 잘해왔는데 갑자기 신입 비주얼 디렉터 겸 조연출이 된 이 기분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릴러말즈가 말하듯 정말이지 몸이 두 개였으면 하는 맘도 고백했습니다. 내가 왜 A 브랜드 촬영을 가서 B 브랜드 디자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느라 디렉팅도 못하고 전화통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지, 왜 항상 멘션은 나의 몫이었던 건지, 윗선에서 알아서 백업 인원을 정리해 주면 안 될 일이었던 건지, 이게 단순히 내가 부탁을 하지 못하고 혼자 해결하려는 성향이라서 힘든 상황인 건지…. 이제는 답을 모르겠습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퇴사 통보에 저도 회사도 동료들도 놀란 요즘. 이제는 양손 가득 도넛을 들고 스튜디오까지 뛰어갈 일도, 모델이 늦잠을 자서 똥줄을 태울 일도, 협업하다가 속 터질 일도 없다는 사실에 상쾌 통쾌합니다. 한편으로는 백수가 된다는 사실과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먹고 싶은 거 다 먹는 여유 있는 백수 생활을 즐기고 싶다는 욕구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다들 이제 그만 급한 이직은 그만두고 천천히 너의 달란트와 어우러지는 회사를 고르라고 조언해 주시는데, 서른 넘어가기 직전의 이 고비에 서서, 그 말에 어리광 좀 피워 만만디 하려고 합니다. 에디터란 무엇인가 고찰할 수 있었던 반년이었네요. 앞으로 남은 하반기를 위해 서두르지 말고 더 유연해질 것. 진심 어린 조언, 잊지 않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