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데자뷰의 법칙
13일의 금요일, 정규직 전환을 알리는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말인 즉 이직한 지 이제 한 달이 지났다는 뜻이군요. 그리고 이걸 불행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행운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이던 명절 연휴 전날, 그룹장님, 팀장님들과의 첫 면담이 이루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수습기간 업무 평가는 100점 만점에 100점. 시작은 85점 정도로, 이번 회사 생활은 가늘고 길게 하고 싶다는 소원이 있었는데 그 소원은 이번에도 이루어지기 힘들 것 같습니다.
가늘고 긴 회사 생활에 대한 갈증이 생긴 이유는 많은 실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이 책임감이 강해서인지, show and prove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항상 입사 초반에는 야근과 주말 근무가 일상이었습니다. 가끔은 팀, 혹은 회사에서 가려워하는 부분을 살짝 긁어드렸을 뿐인데 회사가 보기에는 대단한 갈퀴질을 한 것처럼 보였나 봅니다. 그 후로는 이 일도 제 일, 저 일도 제 일이 되어 미친 듯한 업무량에 헐떡이다 남들보다 이르게 퇴사를 결심하곤 합니다. 적당히 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에 나름 요령을 피워 보기도 하지만 제 기준에서 ‘나름’은 남들이 보기에 턱없이 부족한 것 같네요.
이직 면접 중 피할 수 없는 질문은 짧은 재직 기간과 잦은 이직에 관한 것들입니다. 회사마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덧붙여 설명하지만 원초적인 이유는 아마 번아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실수를 네 번 반복하고 들어간 회사에서는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웬걸, 직급은 올랐지만 직장 생활의 끝과 시작은 닮아 있네요. 경력에 비례해 더욱더 강력해진 모습으로 또 다른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시련에 기시감을 느끼곤 합니다. 많이도 울었던 저번 직장을 벗어난 해방감도 잠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이 상황을 보며 실패한 이직의 데자뷰 (déjà vu; 최초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나 현상)와 나 안가람은 행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가끔 이렇게 휴일이 길 때면 저녁 바람에 몸을 맡기며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만약 성급하지 않은 이직을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만약 내가 주변 사람들의 충고를 듣고 일을 덜 했더라면 지금쯤 편해져 있을까?’라고요.
그러나 세월의 풍파 겪을 만큼 겪어본 우리는 ‘만약에’ 가정법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힘없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좋은 말로는 적응력이 뛰어나 나쁜 말로는 비관적이라 어떤 상황에서도 안 좋은 점을 콕 집어내는 저는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또 ‘만약에’를 되뇌며 불평을 늘여 놓고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이제 선택의 결과는 미워하되 그 선택을 한 나 자신은 미워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는 점입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인간의 천성은 바꾸기 어렵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매사에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것, 일이 만족스러운 레벨로 만들어 놓기까지 업무 스위치를 끌 수 없는 것. 그럼에도 하기 싫다고 툴툴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타고난 제 성격입니다. 남들보다 덜 낙관적이게 살아야 한다는 짐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저를 미워하고 싶진 않습니다. 이십구 년이나 함께 했으면 이제는 이해하고 끌어안아줘야죠.
돈 없는 까칠한 워커홀릭이 되어 버렸지만 누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습니까. 천성 반, 상황 반으로 빚어진 제 페르소나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래도 나이를 조금 더 먹어서 인지 첫 번째 이직 때 보다 지금이 훨씬 여유롭습니다. 역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아우라는 무시할 수 없나 봅니다. 제가 남들을 보고 참 무던하게, 쉽게 일을 잘한다고 느끼듯 누군가는 저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고 그렇게 서로의 든든한 지지목이 되어줄 수 있다는 환경에 위안을 받습니다. 이렇게 보니 이전보다 나아진 점도 많군요.
최근 한 철학 잡지에서 불확실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읽었는데, 모든 글의 결론은 1.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2. 불확실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완벽함, 확실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래요, 불확실성과 변수의 연속인 직장 생활이 우리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너무 자기 자신을 탓하지 말기로 합시다. 확실한 건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든 우리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사에 날 세우고 있을 2019년 이맘때의 저를 찾아가 곧 괜찮아질 거라 말하며 꼭 안아주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