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TO에는 산수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카피 때문에 빡쳐 시풀거리며 저녁밥을 먹던 와중, 뜬금없이 ‘너도 챗GPT로 일하니?’라고 엄마가 묻습니다. ‘아니.’라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가 너무 심했나 싶어 ‘왜?’라고 물으니 미국에서는 카피라이팅과 마케팅 업무를 챗GPT가 대신하고 있다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합니다. ‘엄마, 여긴 미국이 아니라 괜찮아.’라고 대답하지만 어쩌면 나도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오싹해지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내가 그만두기 전 까지는 충분히 먹고살 수 있겠지’라고 위로하지만 글쎄요? 직업도, 자리도 언젠가는 푸시맨, 엘리베이터 걸처럼 역사 속 직업으로 사라지고 말겠지라는 생각으로 저녁 식사를 마무리합니다.
아직까지 취업 사이트에 들어가면 카피라이터, 콘텐츠 기획자, 에디터 공고는 간간이 눈에 띕니다. 그중에서 제가 들어갈 수 있는 회사는 한 곳뿐. 슬프게도 제가 그 회사에 딱 맞는 인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다니는 회사에 빈자리가 생겨도 그 자리를 완벽하게 메꿔 줄 만한 사람이 들어올 확률은 0에 수렴하죠. 회사는 뽑을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고, 구직자는 갈 만한 회사가 없다고 투덜거리는 이 아이러니 때문에 TO 충원도 안 된 상태에서 팀원 없는 팀에서 버텨 보기도, 실무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충원이 되지 않아 답답해하기도 했었습니다.
옥외광고 회사 인하우스 마케팅을 담당하던 시절, 겉만 번지르르한 ‘국내마케팅본부’ 소속이었습니다. ‘본부’라고 해봤자 총 인원 셋, 그중 실무 쳐내는 건 둘 뿐. 한 친구는 바이럴과 키워드 마케팅을 담당하고, 저는 콘텐츠 기획과 디자인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그런 구조였죠. 그리고 우리가 한 걸 보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리더 하나.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웬걸, 키워드를 담당하던 친구가 갑자기 퇴사를 한다네요. 대표는 TO 충원해 줄 생각은 안 하고 나나 팀 리더가 그 친구를 괴롭힌 건 아닌지 추궁이나 하고 있고… 그래서 결국 내가 퇴사할 때까지 8개월 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3-1=3인 상태로 둘이서 일쩜오인분의 일을 해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포트폴리오에도 넣지 못할, 대표만 신나서 진행했던 부끄러운 옥외광고 알리기 프로젝트도 했었는데 혼자서 공문을 몇 개나 보냈던지… 팀 리더와 저 둘 다 못 버티고 거의 동시에 퇴사를 하자 국내마케팅본부는 한참을 유령처럼 이름만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가끔 구 회사 SNS를 구경하는데 사람이 구해진 건지 아닌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기존 인원이 원하는 대로 TO 충원이 되지 않는 것도 큰 스트레스입니다. 실무진이 원하는 인재상과 관리직이 원하는 인재상에서 괴리가 생기면 그거야 말로 골치 아픈 일입니다. 실무진은 발로 뛰어 줄 사람이 필요해서 충원 요청을 하는 건데 관리직은 자꾸 실무에서 동 떨어진 사람을 충원하면 사기가 올라갈 리가 없죠. 관리직이 봤을 때 ‘요즘’ 실무 치는 아이들이 성에 차지 않는 건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컨펌 단계가 늘어나거나, 프로세스가 바뀐다고 해서 우리네 실력이 갑자기 뽕을 맞은 듯이 성장하진 않습니다. 한 팀장님이 면담 중 제게 해준 말 중에 ‘사람이 바뀌면 프로세스가 바뀐다.’라는 게 참 와닿았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이 들어오면 당연히 그 사람이 잘하는 것과 못 하는 것, 성향과 연차, 직급에 맞춰 업무 프로세스는 바뀌기 마련입니다. 실무진은 실무를 치는 와중에 그런 것도 신경을 써야 하니, 머리만 더 지끈거립니다. 괜히 텃세라는 게 생기는 게 아닙니다.
KPI, OKR 같은 수치와 정성적 평가로 우리네 고과는 갈릴 것입니다. 누군가는 일을 많이 해도 고과가 낮을 수도, 누군가는 설렁설렁 일해도 회사와 쿵짝이 잘 맞아 승진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와중에 사람이 나가고 들어가는 것이 반복되고, 내 일만 늘어난다면 사기가 떨어지는 건 자명한 일이겠죠. 평가는 수치나 등급으로 갈릴지 몰라도 결국에는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래서 TO를 충원과 조직 적응이 반복되는 것인데, 왜 회사는 사람의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요? (이렇게 쓰고 있는 와중에 왜 우리 직원들은 내 마음을 몰라줄까라고 생각하는 관리직 분들, 대표님들도 계시겠죠.)
억울한 마음 내려놓고 냉정하게 보면 회사는 돈을 벌어야 하는 곳인지라 일 많이 하는 사람은 당연한 거고, 괜히 적게 하는 사람한테 일 더 줬다가는 도망이라도 갈 세라 입 닫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거겠죠. 항상 일 많이 하는 측에 속하는 지라 억울한 마음도 있고 이번 분기 동안 두 번의 진단을 받고 만성 기침을 달고 살 만큼 몸은 망가지는 중입니다. 맡은 일은 묵묵히 하겠지만 이러다가 정말 일하다 깰꼬닥 하겠구나 싶어서 무섭습니다. 제발 쉽게 일하고 숟가락만 얹으면 포트폴리오가 완성되는 매직을 경험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