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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Sep 10. 2018

page 5. 가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안다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가랑비메이커 / 45p

가랑비메이커 매거진

가랑비, 그녀의 책갈피

책을 펼치고 쓰는 그녀의 책갈피가 머무른 곳



 추수하는 계절

 문득, 외로워지는 계절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 봄과 여름 지겹게 뿌리던 씨, 그 결실을 추수하는 계절이라는데 어쩐지 외로워지는 건 왜일까.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가을이라고 외치는 내가 가을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이런 모순된 감정과 멀지 않다.





양손 가득 쥐고 있는 이들과 여전히 빈손이 부끄러운 이들이 더욱 극명하게 느껴지는 계절이지만 그렇기에 위로로 다가오는 계절.


어릴 적부터 나는 가을이 좋았다. 두근거리는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도 아니고, 여름이나 겨울처럼 방학이 있는 계절도 아니었다. 그다지 새로울 것 없이 흘러가는 계절. 뜨겁고 차가운 힘을 과시하는 계절 사이에 놓인 그저 그런 계절처럼 보는 가을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 어중간함이 내겐 위로가 됐다.


푸릇한 계절에 떠나는 피크닉엔 모두가 행복해야만 할 것 같았다.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뒤덮인 화이트 크리스마스에도 곁에 누군가 없이 보내는 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했다. 모두가 앞다투어 전시하던 그들의 행복을 빗대면 내 나날들은 지극히 평범에도 미치지 못할 때가 잦았다.


그러나 위태롭게 달려있던 가지들이 비틀비틀 힘을 잃어가더니 하나둘 떨어지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는 가을은 달랐다. 무채색의 거리를 걸으며 파란 하늘을 올라다 보며 괜스레 시큰해지는 눈시울과 코끝이 온전히 나만의 몫이 아니었기에 위로가 됐다.


"나, 혼자만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구나. 당신들처럼 내게도 쉼이 필요하구나."





상처를 터놓는 계절

가을에 서서



가을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아마도 고요해도 괜찮은 계절이기 때문이 아닐까. 더위를 피해 조금 더 화려한 이국의 휴양지를 찾아야 할 필요도, 추위를 견뎌낼 뜨거운 사랑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는 조금은 미적지근한 계절.


예고도 없이 찾아온 마음속 파도, 심연의 우울을 괜한 웃음으로 들뜬 목소리로 덮어낼 필요가 없어서. 그저 앙상하게 뼈대만 남겨진 나무를 기둥 삼아 기댈 수 있어서 가을이 위로가 되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상처를 한두어 달 허락되는 짧디 짧은 계절에서만큼은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어서 당신에게.


가을을 기다리던 당신이어도 좋고 가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당신이어도 좋다. 어느새 더위를 몰아내고 성큼 다가온 이 계절에서만큼은 당신의 상처를 터놓을 수 있기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망설이던 사이, 어느새 스륵 사라져 버리고 말 가을을 아쉬워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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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메이커 / 3집 작가 / 그럴듯한 이야기보다는 삶. | 인스타그램 @garangbi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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