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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Apr 24. 2019

과정을 잊지 말자, 그 가운데 있는 자신을

가벼운 계절에 무거웠던 걸음으로 마주한 얼굴


곁에 있는 이들에게서도, 저 멀리 닿은 적 없는 이들에게서도 “잘하고 있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내 생각이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나의 시선과 생각이 삶의 동기부여로 작동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런 내가 나에게 지쳐버려 그만 백기를 던지고 싶었던 시점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러거나 말거나 해야 하는 일들은 여전히 남겨져 있었고 나는 나를 놓친 채 나의 무엇들을 해내야 했고 수많은 관계 역시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어그러지는 것들이 많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물음표의 시간은 처음이라만치 낯선 것이어서 나는 거울 앞의 나조차 어색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귀를 닫고 있을 때 하나의 해답이 찾아왔다.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서 만났던 서정 언니. 그녀와 나는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만날 때마다 우연찮게도 삶의 굵직굵직한 골곡을 지나는 지점에 서 있었다. 이날의 언니는 오래 준비한 사진집 시리즈 출판을 앞두고 있었고 나는, 전반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슬럼프라는 단어가 주는 고정적이고 한정적인 의미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위태로운.



결과에 대한 반응은 그다음인 것 같아
중요한 건 그 과정이고
거기서 우리가 무얼 느꼈고
무얼 담고 싶었는가.


“맞아요.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과 느끼는 것이, 제가 과정에서 느꼈고 의도했던 것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허우적대던 이유에는 사실 다른 게 없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책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모든 물음의 앞에는 “남들에게”라는 전제가 생략되어 있다. 그렇게 내 삶에서 나만 쏙 빠져버렸던 거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북 토크에서 나는 <그 어떤 순간에도 나를 내 삶의 엑스트라로 밀어 두지 않을 것> 이라며 삶의 주인이 되는 글쓰기의 필요성에 대해 피력했었다. 그런데 애라의 삶에는 애라만 없었다.


이날의 대화는 마치 디톡스처럼 내 마음과 생각에 자리 잡았던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털어버리게 만들었다. 대단한 명언도 아니었고 새로운 패러다임도 아니었다. 나 역시 모르지 않았던 이야기이지만, 잊고 있었다.


어떤 가치를 담아내는 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순수한 선과 열망이 있느냐인 것이지, 많은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나에게 감사와 만족을 줄 수 있느냐. 이 간단하고도 명료한 사실이 나에게 자유를 안겨주었다. 더불어 여전히 진행 중인 것들을 마주하는 새로운 감각들도.


대화를 마치고 나니 거짓말처럼 가벼워진 마음이었다. 밖에서 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보다 안에서 문을 당겨 나갈 때, 나아가는 방향도 손이 쥐는 힘의 강도도 모두 이전보다 씩씩하고 단단해진 것 같았다. 밖을 나섰다. 비가 온다더니 비는 아직이었고 태풍이 오기 전처럼 시원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우리는 바람을 맞으면서도 덥다는 이야기를 했고 근처 가게를 찾았다. 긴 셔츠 대신 입을 티셔츠를 함께 고르며 가볍고 웃음을 나누었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다음을 약속하며 각자의 길을 향해 걸어갔다.








당신의 인디, 가랑비 @garangbimaker
/매일 한 문단을 남깁니다.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
<숱한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왔어도>
<고요한 세계에 독백을 남길 때>를 출간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garangbi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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