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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Mar 22. 2016

언젠가 우리가 느린 걸음으로 마주한다면

가랑비장면집 #scene 3


가랑비메이커 장면집

<언젠가 머물렀고 언젠가 놓쳐버린>

#scene 3. 우리가 언젠가 느린 걸음으로 마주한다면




1 언젠가 우리가

느린 걸음으로 마주한다면


아무리 많은 기억들이 얹어지고 덮어진대도 언제까지나 선명해질 기억이었다.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을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과 함께 마주해야 했던 그날의 그 장면은.




2 스물셋

아직은 익숙하고 편한 것보다도 조금 경직되더라도 낯선 것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길 좋아했던 나이었다.

유난히 찾아오던 걸음들이 많았고 때론 조금은 느리게 따라 걸었고 가끔은 함께 발 맞춰 걷기도 했던. 그런 나이 스물셋.


아무래도 조금 덜 서툴렀던 모습이 잘나봉였고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적당히 다정하던 눈빛과 말투에 이끌려 그렇게 나는 너를 알아갈 시간도 없이 방향을 틀어갔던 것 같다.


따듯하고 아늑한 곳에 마주 앉기 보다도 서늘한 공기 사이로 나란히 춤을 추듯 걷기를 좋아했던 우리는, 언제나 하얀 입김과 함께 했는데


이렇게 따듯한 봄날에,
따라오는 입김도 없이
고민할 새도 없이, 이렇게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을 몰랐다





3 가을, 이라는 계절


조금씩 떨어져 갔지만 낙엽은 아직 바스락, 부서지기 전이었고 우리는 서로를 느리게 알아갔다.


침묵이 끼어들 새도 없이 오가던 질문 사이로 몇 번을 미소 지었을지는 여전히 모를 일이다.  



유난히 고민과 함께 깊어지던 계절이었다. 이전처럼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언제나 머리 아닌 가슴을 믿는다는 네 말 한마디에
 바람결에 나뭇잎 흩날리듯.


그렇게 위태롭던  나를 끝내고 싶어 내렸던 결정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조금 더 올곧게 서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흘러가던 우리를 더 지켜보기엔 유난히 추웠고 겁이 났던 어느 가을밤. 누가 먼저 등을 보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에 우리가

서로에게 남겼던 한마디.



4 문장으로 기억된다면

다음에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만남에 있어서 그 끝이라는 건, 적어도 다음이라는 걸 기약하기 위한 약속이 아니라고 믿었으니까. 순진하게도


그럼에도 '문장으로 기억된다면 좋겠어.' 라던 너의 말에 머뭇거리던 나를 보며 '너를 노래하는 날이 올 거야.' 그 말 한마디 남기고 돌아선 너는 기타를 매고 느리게 느리게 사라졌지.



5 잊었던 걸까, 외면했던 걸까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몇 바퀴를 돌았다. 누구도 몰랐던 우리의 시작에- 그 끝도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고 아팠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저, 어느 새벽 가벼운 기억 하나로 남겨졌던 그 장면들.


네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게 두렵지는 않았는데 익숙해질 만큼. 꼭 그만큼 들었던 네 노래들, 그 위로 정말 그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날이 낭만적인 감상이 아닌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쉽게 사라지지 않던 화로 뒤범벅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날의 기억들이 아름다운 선율을 타고 누군가에겐 낭만적인 상상을 데려온다는 게 거짓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텅 빈 방 안에서 자꾸만 찾아 듣던, 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6 나는, 정말 아니었나

작은 메모지 한 장, 페이지 하나 허락되지 않았더라면 나를 휩쓸고 다시 돌아서버렸던 그 등들을 나는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여전히 그런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것이 어색한 나는 마주한 페이지 앞에서도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덮고 마는, 어설프고 부족한 사람인데.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기자는 그런 질문을 했다. '연애에 대한 글을 쓰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 하나가, 몇 날 며칠의 나를 묶어두고 놔주지 않았다. 여전히-


그러다 아무 일도 없단 듯 그 다정한 미소를 하고 내 책을 끼고 불쑥, 찾아온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는 무엇을 읽었을까, 다소 상기되고 또 조금은 들떠 보이던 네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7 잘 왔다, 너의 그 시간들을 존중해


나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그들이 얼어붙은 내 얼굴을 발견할까 봐, 숨도 쉬지 않던 내게 네가 뱉은 말.


너의 그 시간들 모두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잘 왔다, 여전히 멋져.
너의 그 시간들은 존중해

지금 나를 찾아온 건 너인데, 잘-왔다. 그 한마디가 웃기기보단 눈물이 났다. 여전히 나는 거둬낼 수 없는 어설픈 구석이 네게는 조금도 없었다. 나도 몰랐던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꺼내 주던 너를 바로 볼 자신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수계 절을 다시 돌아, 느린 걸음을 떼어 내게 와준 너를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네게서 멀어졌던 나를 이해하고 싶어 졌지.



그래서 나는 다시 느린 걸음으로 너에게 돌아가서 속삭이려고 해.




가랑비메이커 장면집

다음 이야기 #scene 4 지금 당신이 아득한 새벽에 놓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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