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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Mar 23. 2016

지금 당신이 아득한 새벽에 놓였다면

가랑비장면집 #scene 4.


가랑비메이커 장면집

<언젠가 머물렀고 언젠가 놓쳐버린>

#scene 4. 지금 당신이 아득한 새벽에 놓였다면



1 새벽공기의 기억


모르지 않는다. 잠들지 못하는 이들에게 새벽은 어제와 오늘 혹은 오늘과 내일 사이,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을. 아득한 것들, 잡히지 않는 것들만이 찾아오는 그런 시각.

주어진 것을 움켜쥐고도 돌아갈 줄 모르는 허기진 내게 연민을 보내는 밤, 이 있었다.

그럼에도 곁에 선 이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고마웠던, 그래서 조금 덜 무거웠던 새벽, 그 사이의 공기를 기억한다.




2 푸른 봄


청춘, 푸른 봄이라는데 왜 서늘하기만 한 건지. 막연하게 던져진 불만들 사이로 누군가 오래된 문장을 읽어내듯 아주 천천히 뱉어낸 그 문장에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하던 학교 앞 카페. 모르던 얼굴들이 남겨둔 닳은 고민들.


비슷한 주제로 잠시 생각에 잠겼었다. 긴 공강이 끝나면 사진을 하는 친구의 작은 프로젝트를 도와주기로 했었다.

청춘을 한마디로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대뜸, 청춘에 대해 다른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무엇인지. 생각해 오라던 그 말에 '글쎄....' 닳고 닳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면 왠지 반항심부터 들었던 나였다.


언제는 낭만과 도전의 다른 말이더니-

어느새  젊은 사람들과 늙은 사람들을 반으로 갈라놓기 시작한 그 두 글자,에 대해 나는 어느 편에 서서 무어라 할 수 있을까.





3 암실


암실 같던 스튜디오에는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그 옆엔 갈색 종이 쇼핑백과 매직이 하나.


설마, 했던 일이 정말이었다. 아무렇게나 신경 쓰지 않고 와도 된다던 말이 이런 의미일 줄은 몰랐는데.



상반신까지만 잡히는 앵글에, 그마저도 얼굴엔 쇼핑백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앞 선 사람들이 남겨둔 단어들을 읽어보았다. 아무래도 그네들이 정의한 각자의 청춘인 것 같았다.


호기롭게 '나다'라고 쓴 키 큰 사내
왜소한 여잔 '다시 오지 않는 것'이라,
건들 건들해 보이는 걸음걸이를 한 얼굴 모를  '그림자'의 청춘


기억나는 건, 겨우 이 정도.


다음 순서가 되도록 나는 아직, 잡히지 않는 청춘이라는 것에 대해 애쓰고 있었다. 나름대로 글을 쓴다라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잘도 써 내려간 듯한 이들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4 아득한 새벽


왜 그랬는지, 갑갑한 마음에 비어있는 봉투를 뒤집어썼을 때 나는 아득한 새벽과 마주했다.


문득 새벽이 찾아왔다. 이미 어두웠던 암실도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고 그들의 단어들을 읽어내며 나는 망설였었다.

봉투를 뒤집어쓰고 찾아오는 안도와 평온을 잠시 느꼈다.


무슨 이야길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바보 같은 봉투들 사이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이 알 수 있을까.


춤을 춘다고 해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넘어질 수도 있겠고 다시 일어서는 데까지 꽤나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도 없지.

우린 어차피 같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이니까.





5 우리가 나눠가진 마음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는 봉투를 벗어야 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랬다.


그런데 불쑥 또 호기심이 그대로 한 발작 한 발작 나아가게 했다. 작은 스튜디오에서 크고 작은 것들에 부딪혀 넘어질 뻔하면서도 종종걸음으로 다시 그 의자 앞까지 도착하기까지에는


주변에서 들려오던 '왼쪽으로-오른쪽으로- 어어, 거긴 마이크가 있어요.  머리를 낮춰봐요.-'라는 말마디들이 있었다.


내가 어련히 갈 텐데 라는 묘한 반항심과 또 조금은 안정되던 마음이 있었고, 지금 내게 이야기하는 저 목소리는 조금 전까진 어떤 단어를 뒤집어쓰고 있던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도 함께. 그렇게 제 자리에 도착했다.






6 지금 당신이

아득한 새벽에 놓였다면


아득한 새벽.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그래서 흠뻑 취하고만 싶은 그런 새벽이 아니라

그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런 아득함이 가득한 새벽.

그럼에도 하루 모두가 새벽이지 않듯이 결국 다시, 새로운 빛으로 이어질 작은 희망의 시간.


나는 그런 시간을 뒤집어쓰고는 함께 뒤집어쓴 다른 얼굴에게 무슨 이야길 할 수 있을지,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돌아가자마자, 나와 같이

허우적거리고 있을 누군가에게

지금 당신이 아득한 새벽에 놓였다면- /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가랑비 메이커 단상집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 들> 90-91페이지가 되었다.



가랑비메이커 장면집

다음 이야기 #scene 5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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