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장면집 #scene 4.
가랑비메이커 장면집
<언젠가 머물렀고 언젠가 놓쳐버린>
#scene 4. 지금 당신이 아득한 새벽에 놓였다면
모르지 않는다. 잠들지 못하는 이들에게 새벽은 어제와 오늘 혹은 오늘과 내일 사이,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을. 아득한 것들, 잡히지 않는 것들만이 찾아오는 그런 시각.
주어진 것을 움켜쥐고도 돌아갈 줄 모르는 허기진 내게 연민을 보내는 밤, 이 있었다.
그럼에도 곁에 선 이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고마웠던, 그래서 조금 덜 무거웠던 새벽, 그 사이의 공기를 기억한다.
청춘, 푸른 봄이라는데 왜 서늘하기만 한 건지. 막연하게 던져진 불만들 사이로 누군가 오래된 문장을 읽어내듯 아주 천천히 뱉어낸 그 문장에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하던 학교 앞 카페. 모르던 얼굴들이 남겨둔 닳은 고민들.
비슷한 주제로 잠시 생각에 잠겼었다. 긴 공강이 끝나면 사진을 하는 친구의 작은 프로젝트를 도와주기로 했었다.
청춘을 한마디로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대뜸, 청춘에 대해 다른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면, 무엇인지. 생각해 오라던 그 말에 '글쎄....' 닳고 닳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면 왠지 반항심부터 들었던 나였다.
언제는 낭만과 도전의 다른 말이더니-
어느새 젊은 사람들과 늙은 사람들을 반으로 갈라놓기 시작한 그 두 글자,에 대해 나는 어느 편에 서서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암실 같던 스튜디오에는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그 옆엔 갈색 종이 쇼핑백과 매직이 하나.
설마, 했던 일이 정말이었다. 아무렇게나 신경 쓰지 않고 와도 된다던 말이 이런 의미일 줄은 몰랐는데.
상반신까지만 잡히는 앵글에, 그마저도 얼굴엔 쇼핑백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앞 선 사람들이 남겨둔 단어들을 읽어보았다. 아무래도 그네들이 정의한 각자의 청춘인 것 같았다.
호기롭게 '나다'라고 쓴 키 큰 사내
왜소한 여잔 '다시 오지 않는 것'이라,
건들 건들해 보이는 걸음걸이를 한 얼굴 모를 '그림자'의 청춘
기억나는 건, 겨우 이 정도.
다음 순서가 되도록 나는 아직, 잡히지 않는 청춘이라는 것에 대해 애쓰고 있었다. 나름대로 글을 쓴다라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잘도 써 내려간 듯한 이들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갑갑한 마음에 비어있는 봉투를 뒤집어썼을 때 나는 아득한 새벽과 마주했다.
문득 새벽이 찾아왔다. 이미 어두웠던 암실도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고 그들의 단어들을 읽어내며 나는 망설였었다.
봉투를 뒤집어쓰고 찾아오는 안도와 평온을 잠시 느꼈다.
무슨 이야길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바보 같은 봉투들 사이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이 알 수 있을까.
춤을 춘다고 해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넘어질 수도 있겠고 다시 일어서는 데까지 꽤나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도 없지.
우린 어차피 같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이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는 봉투를 벗어야 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랬다.
그런데 불쑥 또 호기심이 그대로 한 발작 한 발작 나아가게 했다. 작은 스튜디오에서 크고 작은 것들에 부딪혀 넘어질 뻔하면서도 종종걸음으로 다시 그 의자 앞까지 도착하기까지에는
주변에서 들려오던 '왼쪽으로-오른쪽으로- 어어, 거긴 마이크가 있어요. 머리를 낮춰봐요.-'라는 말마디들이 있었다.
내가 어련히 갈 텐데 라는 묘한 반항심과 또 조금은 안정되던 마음이 있었고, 지금 내게 이야기하는 저 목소리는 조금 전까진 어떤 단어를 뒤집어쓰고 있던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도 함께. 그렇게 제 자리에 도착했다.
아득한 새벽.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그래서 흠뻑 취하고만 싶은 그런 새벽이 아니라
그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런 아득함이 가득한 새벽.
그럼에도 하루 모두가 새벽이지 않듯이 결국 다시, 새로운 빛으로 이어질 작은 희망의 시간.
나는 그런 시간을 뒤집어쓰고는 함께 뒤집어쓴 다른 얼굴에게 무슨 이야길 할 수 있을지,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돌아가자마자, 나와 같이
허우적거리고 있을 누군가에게
지금 당신이 아득한 새벽에 놓였다면- /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가랑비 메이커 단상집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 들> 90-91페이지가 되었다.
가랑비메이커 장면집
다음 이야기 #scene 5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