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글을 쓰고 계절마다 책을 펴내며 살다 보니 때때로 활자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납작해진 엉덩이를 일으켰다. 책장을 등지고 문밖을 나섰다. 몇 줄의 문장을 줍겠다고 미뤄둔 얼굴들을 야금야금 아껴 먹듯 만났다.
늘 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는 H와 함께 눅눅한 여름밤을 드라이브하며 사랑이라는 진부한 물음에 촘촘한 해석을 나눴고, LP 음악이 흘러나오는 한 평의 카페에서 뜨거운 홍차를 홀짝이며 S는 나의 작은 변화를 섬세하게 읽어주었다. 35도에 육박하는 썸머 타임의 런던에서 Y는 기브 앤 기브의 사랑을 알려주었다. 평생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은 K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에 오랜만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어느새 초조함으로 지키던 작업실을 벗어나 문밖을 나서는 일이 잦아졌다. 평온한 듯 무심한 듯 무표정했던 얼굴에 바보 같은 주름을 만들며 웃고 우는 일이 많아졌다. 관자놀이가 당길 정도로 웃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다시 글이 쓰고 싶어졌다.
서로 다른 모양으로 삶을 일구는 이들이 내게 전해 오는 생생한 영감과 삶의 재치, 다정한 안부를 쓰지 않고서는 이 계절을 건너올 수 없을 것 같았다. 8년의 긴 무명의 작가 시절을 견디게 해준 건 "그럴듯한 이야기보다는 삶으로 이야기하고 싶다."던 구호였으니까. 조금은 어설프고 허술한 듯해도 사람 냄새가 나는, 우리가 나눈 말들을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쓰고 싶은 말도, 쓸 수 있는 말도 없어서 도망친 곳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쓰는 일을 대수처럼 여겨 자주 기다림을 안겼고, 이따금 실망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늘 같은 자리에서 나를 가만히 들여다봐 준 H, S, Y, K..... 그리고 아직 닿지 않은 이름들.
A와 Z 사이에서 나눈 말들이 나로 하여금 긴 침묵을 끝내고 마침내 새로운 이야기를 쓰게 했다. 이 이야기는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오랜 세월 나의 성실한 독자가 되어준 그들에게 헌정하는 이야기이다.
“결국, 나를 다시 쓰게 하는 것은 A에서 Z까지 서로 다른 모양의 당신들이다.”
8년차 에세이 작가. 출판사 문장과장면들을 운영하고 있다. 가랑비클래스를 운영하며 글과 삶을 나누는 다양한 클래스와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팟캐스트 <아주 오래전에>를 통해 책과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첫 책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2015)을 시작으로, 장면집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2017), 단상집 <숱한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왔어도>(2018), 고백집 <고요한 세계에 독백을 남길 때> (2019), 가족 에세이 <거울 같은 당신께 겨울 같던 우리가>(2020), 편지 <가깝고도 먼 이름에게>, 계절 에세이 <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 현재까지 8권의 책을 펴냈다. 출간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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